‘바다오염 방지하여 수산자원 보호하자’
그렇게 한쪽 기둥에 뺑끼칠까지 해두었건만, 10년이라는 시간은 바다도 어판장도 가마두지 않았다.
바다는 땅이 돼가고, 마산 남성동 어판장은 이미 주차장이 됐다.
10년 전 마산 아침을 열어 제치던 곳,
새벽 6시면 어김없이 경매사가 어느 한쪽 우뚝한 곳에 서서 “##$$%% && ÆÆÐД 알 수 없는 소리를 반복했다.
반대편 중매사들은 손가락을 한 개 두 개, 위로 아래로 역시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내 낙찰을 보곤 했다.
생물 그대로의 활어, 냉동을 거친 선어가 그렇게 장사가 잘 될 때에는 하루 몇 억 원어치 이상 팔려나갔다.
그래서 마산이 창원에 통합되기 전에는 마산 아침을 연다고, 마산 경제를 연다고 마산시장이 해마다 연초 초매식 때 참석을 했다.
나도 <경남도민일보> 골목 시리즈를 열어 제치는 곳으로 10년 전 여기에 왔었다.
그런데 그 어판장 골목이 그만 자리를 내줘 버렸다.
방재언덕인지 뭔지 하는 매립공사로 앞바다를 모두 내주게 돼버렸다. 그 옆 횟집거리도, 장어집거리도 똑같이.
하긴 남성동 어판장도 이전부터 온전히 제 자리는 아니었다.
마산 어판장은 팔자가 기구해 거의 10년 20년 단위로 자리를 옮겼다. 매립하면 앞으로, 또 매립하면 그 앞으로 옮기기를 50년 이상 계속해왔다.
10년 전 어판장으로 돌아간다.
2017년 2월 22일.
골목과 사람(1)마산 남성동 어판장 골목 - 2006년 3월 4일
물고기 생사가 갈리는 ‘천년의 포구’
왜 골목을 기록하는가? 답을 찾기 위해 골목에 대해 사람들에게 물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 ‘들어가면 못 나오는 곳’ ‘연인들이 몰래 뽀뽀하는 곳’. 이런 대답도 있었다.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이 나란히 가는 곳’, 응답의 공통점은 ‘사람의 소유’라는 것이었다. 바쁜 사람 한가한 사람, 기쁜 사람 슬픈 사람, 나이 어린 사람과 지긋한 사람이 함께 부대끼는 곳이 골목이다.
골목의 쇠락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새삼스럽다. 네모로 블록화 되는 상권과 주거권으로,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옛 골목이 거리로 구획돼 가는지 오래다. 주거공간의 변화는 의식과 문화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골목을 기록하는 일이 급해졌다. 역사가 없는 현재와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장차 없어질 골목의 모습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단편적이나마 남긴다. 마산을 그 처음에 두는 이유는 도시발전의 정점인 포구를 축으로 점점 더 폭넓게 형성된 마산의 골목이 그 형태를 유지하는 곳이 많아 상징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마산시사, 허정도 건축사의 ‘근대기 마산의 도시화과정 연구’ 논문 등이 참고 자료가 됐다.
△마산이 시작된 곳, 마산을 시작하는 곳
마산은 남성동 어판장 골목에서 시작된다. 새벽 6시, 이곳에서 선어(냉동어) 활어 공판이 시작되면 곧바로 뒤편 중매인 점포가 늘어진 골목에서 소매가 이어진다. 경운기의 발동처럼, 중장비의 모터처럼 이 골목은 도시를 가동시킨다. 더듬어보면 마산이라는 도시를 형성시킨 근원도 ‘마산포’라는 포구였다.
마산포의 기원을 가장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고려 성종 때인 900년대 석두창의 설캄라는 기록이다. 전국 12조창 중 하나로 세공미의 수송을 담당했고, 현 산호동과 남성동 일대의 포구에 있었다고 기록됐다. 그러나 포구의 형상을 들어 남성동 쪽 주장이 유력하다. 이는 조선 영조 때인 1760년 마산창의 설치로 연결된다. 석두창처럼 대동미의 수납과 운반을 맡았다.
이동수단은 당연히 배. 마산창의 위치가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이었다 하니 당시 포구의 위치를 그 앞쪽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마산창을 축으로 마산의 동성·중성·오산·서성·성호·성산 등 6개 이가 형성됐다. 또 포구 주변으로 오선선창·어선창·백일세선창·서성선창 등이 운영됐다. 그래서 이 일대를 ‘원마산’ ‘구마산’이라고 한다. 도시 형성의 거점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마산의 거리나 골목을 유심히 걸으면 포구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도시탄생의 구심제어판장 사람들 생명력도 ‘펄떡펄떡’
어시장 끝 어판장 골목은 길이가 채 1㎞가 되지 않지만 구역은 남성동 동성동 오동동에 걸쳐 있다. 짧은 거리에 법정 동명이 즐비하듯, 이곳을 생업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어판업무를 관리하는 수협 사람들과 그 아래 기선저인망조합이나 권현망조합 사람들, 경매사와 중매인·소매인, 생선을 배에서 끄집어내 경매 후 마지막 포장까지 전 과정을 맡는 항운노조 조합원들까지.
‘펄떡 펄떡’ 뛰는 생동감을 느끼고 싶다면 새벽 6시 어판장의 서쪽 활어경매장을, 경매의 규모가 가장 큰 선어 경매를 보고 싶다면 같은 시각 가운데 위치한 경매장을 찾으면 된다. 권현망조합이 관리하는 멸치 경매는 오전 10시에 시작된다.
1979년부터 이곳에서 일했다는 기선저인망조합 소속 최석준(54) 씨는 “지금은 선어판장만 하루에 5000~6000개(박스) 겨우 넘깁니더. (위판액이) 1억원 안팎밖에 안 됩니더. 80년대만 해도 두세배 넘었지예.” 어업자체의 위축으로, 근해어업에 대한 지나친 제약으로 오그라든 어판장의 오늘이 담겨 있는 이야기였다.
한순간의 위상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없는 어판장의 기능을 중매인 경력 50년의 현역 서양수(75) 중매인의 말에서 느낄 수 있다. “살다보면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소. 잘 하는 사람, 못 하는 사람 생길 수밖에 없지. 물론 70~80년대만큼 고기도 다양하지 않아. 부산처럼 물량이 다양해져야 되지. 중매인들도 손님을 유치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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