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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는 여행

10년전 그 골목에 갔다 - 요정골목

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골목을 찾았던 이유?

 

그때는 사라져가는 골목을 기록하기 위해서라고 <경남도민일보> 지면에 썼었다.

 

'피식'

 

웃기는 이야기다.

 

지금 생각하면 골목에 숨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골목에 숨으면 나는 평화로워졌고, 내 취재는 은밀해졌다.

 

 

 

골목과 사람(4)마산 오동동 아구찜 골목

2006년 03월 25일 토요일

 
마산시사 등에서는 현 남성동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에 조선 영조 때인 1760년 마산창이 설치됐

 

다고 했다. 앞서 설명된 대로 조창은 대동미의 수납과 운반을 맡은 기관이다. 여러 자료에서는 이

 

곳 마산창이 설치된 것을 계기로 마산포가 다시 도시적 형태를 띠면서 발전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마산포가 현 남성동 일대에 삼각형 모양의 구역을 이루었다는 기록도 있다. 마산포와

 

마산창을 중심으로 동성·중성·오산·서성·성산·성호 등 6개 이(里)가 형성됐다.

   
▲ 70평생을 요정골목과 함께 한 유명숙 할머니.

마산창 설립 당시 마산포의 해안선 기록이 흥미롭다.

 

이는 특히 허정도 건축사의 ‘근대기 마산의 도시변화

 

과정 연구’ 논문에 지도와 함께 언급됐다. 현 서성동

 

교차로와 남성동 경남투자신탁, 오동동 다리 등을 잇

 

는 합포로가 당시의 해안선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일제 시대 이후 매립이 반복되면서 마산의 해안선은

 

현 상태에 이르렀다. 당시 마산포 앞에는 서굴강과

 

동굴강 등 두 곳의 방파제가 딸린 어선 정박시설이

 

있었고, 서성·백일세·어선창·오산 등 네 곳의 선창이

 

포함됐다.

결국 마산의 골목은 마산포와 마산창 등 두 곳의 도

 

시발전 거점을 축으로 하나 하나 형성됐다.

홍등 아래 세상사 시름 흥얼거리던…

△오동동 요정골목과 아구찜골목

얼마 전 마산 어시장과 창동·오동동 방향이 갈리는 합포로 중 오동동 입구에 ‘아구찜 거리’라는 대

 

형 그림판이 나붙었다. 교차로에서 오동동 4거리까지, 거리를 따라 모인 아구찜 집이 더욱 부각됐

 

다.

 

사실 찜집은 거리 옆 보다 이곳에서 사이사이 접어드는 골목길에 더욱 많다. 순안산부인과 쪽 불

 

종거리와 이어졌던 작은 골목이 몇해 전 확장됐고, 이 골목에 더 많은 찜집이 생겼다. 이 길을 따

 

라가면 오른쪽으로 난 좁은 골목을 지금도 찾을 수 있다. 바로 이곳이 1960년대 아구찜집이 처음

 

하나 둘 생겼던 옛 아구찜골목이다. 실제 주민들은 이곳을 ‘요정골목’이라고 불렀다. 어떤 연유일

 

까.

1938년 이곳에서 태어나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유명숙 할머니가

 

그 연유를 말했다. “아구찜 집이야 한참 뒤에 안 생겼나. 내가 중학교 다녔던 6·25 전쟁 후부터 요

 

정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큰 요정만 열댓 개가 넘었다 아이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집까지 합치면 그것보다 더 많다.” 자신의 기억에 국민학교를 다녔던 해방 이후까지는 요정

 

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전국에서 마산·부산으로 피난을 왔던 전쟁을 계기로 고급 요릿집, 즉 요

 

정이 흥하기 시작한 셈이다.

   
▲ 이제는 소방로로 확장된 아구찜골목.

전후 하나 둘 요정 들어서고

금방 떠올린 요정 이름에서 요정골목 옆에서 자란

 

그의 인생이 드러났다.

가장 큰 규모로는 춘추원과 연정, 별관 등. 감나무집

 

이나 유정, 동촌장과 사과나무집 등은 접대하는 아가

 

씨만 열 명이 넘는 큰 요정. 그의 표현대로 ‘사장과

 

새댁이 한 둘 있는’ 작은 요정은 그보다 숫자가 많았

 

다 한다. 사실 이런 기억은 나중에 성인이 된 후 가족

 

이나 이웃으로부터 대부분 들었던 것이다. “그 땐 학

 

교 갔다오면 절대로 밖에 못 나갔어. 부모님이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는 자식들 출입을 막은 거야.” 사실

 

매일 밤마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동 술타령이 오동동이냐”하며 흥청거렸던 골

 

목에 자식들을 내놓기가 쉬웠을까.

상권이 오동동 전체로, 또 창동으로 확산된 이후부터 요정골목의 각별한 지위는 낮아질 수밖에 없

 

었다고 한다. 특히 작은 요정이나 통술집, 고갈비집 같은 서민 상대의 대폿집 형태가 창동과 오동

 

동 전체에 생기기 시작하면서 번창했던 요정골목도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골목의

 

명맥은 65년 이후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아구찜 집으로 세파를 이겨낼 돛을 찾았다.

이젠 그자리 아구찜 대신하고

이 해에 아구찜을 처음 만들었다는 진짜할매초가집 박영자(75) 할머니의 찜 제조 배경에 요정 사

 

람들이 있었다. “그때까지는 아구탕을 했었어. 주로 요정 사람들이나 손님들이 새벽에 많이 왔지.

 

근데 어떤 손님이 그걸로 찜을 한번 만들어보라고 했지. 그래서 고추장같은 양념을 넣어 만들어줬

 

더니 계속 찾는 거야.” 그리고 얼마 뒤 같은 골목 안 구강할매집이 아구찜을 따라 하고, 70~80년

 

대 찜집이 줄을 이어 생기기 시작했다.

아구찜이 전국의 명물이 된 배경에는 마산 사람들의 질긴 생활력도 한몫 했다는 것이 오동동이나

 

어시장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40~50년대만 해도 아구는 못 생긴데다 어선의 그물코만 해

 

치는 천덕꾸러기로 버려지기 일쑤였다. 이를 처음에는 탕으로, 나중에는 찜으로 만들기 시작한 배

 

경에 사람들의 독한 생활력이 작용했다는 것. 마산 사람들이 구워서나 먹던 전어를 회로 만들고,

 

천지로 널렸던 미더덕으로 찌개나 찜을 만든 것도 같은 배경이라는 것이다.

   

질기디 질긴 생활력 있었기에

그런 이유로 지금 마산 아구찜 골목과 거리에는 스

 

무 집이 넘는 찜집에서 찜과 탕, 수육과 회 요리 등

 

열 종류가 넘는 아구 요리를 다루고 있다.

지금도 옛 아구찜골목은 오동동 전통의 미로 형태로

 

남아 있다. 50년대 이후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아 보

 

안등이 따로 필요 없던 요정골목도 비록 요정이 없

 

어졌지만 골목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 골목은 앞으로 2~3년 뒤 자취를 감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소방도로가 된 곳에서 요정

 

골목을 따라 오동동 문화의 거리까지 다시 소방로 확장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다소 아쉬워 할 법

 

한 골목의 철거에 대해 함께 나고 자랐던 유명숙 할머니는 어쩐지 시원해 했다.

“아이구 빨리 없어져야제. 좁은 길에 차가 못 들어와 이사 한번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요. 보

 

일러에 기름 한번 넣기는 또 얼마나 어렵다꼬.” 필요해서 사람들이 만든 골목이 필요 없어져 하나

 

둘 그렇게 사라져간다.

 

....

 

10년이 지난 지금,

 

골목은 사라졌고, 할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씀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아이구 빨리 없어져야제"

 

말씀처럼 골목은 없어지고, 오동동문화공원이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10년 전 할머니와 만났던 그 지점이다.

 

이 사진을 찍은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2017.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