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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어린 왕자, 그녀

27년 전 봄 진주의 어느 커피숍.

첫 소개팅 자리에 나는 조금 늦었다. 게다가 미리 와 있던 상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10분 쯤 혼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상대를 더 기다리게 했다. 20~30분을 기다리게 한 셈이다.

숱이 많은 머리, 통통한 볼에 눈동자가 또렷했던 그녀에게 나는

인사를 꾸벅 하고는 엉거주춤 얼버무렸다.

"늦었네요 이거, 죄송합니다..."

그때 상대가 했던 말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니에요. 별 상관없었어요."

"예?"

"책이 재미있어서요."

난 그때 갑자기 차분해졌다. 어이가 없었다고 할까.

그리고는 손 밑에 덮여있던 책 제목을 보았다.

<어린 왕자>

그 책 역시 그래서 잊지 못한다.

조금은 황당했던 그 느낌은 대화하면서 조금씩 옅어졌다. 그녀는 더 이상 어린왕자 이야기 따윈 하지 않았고, 내 말을 정말 잘 들어줬다. 그런데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다. 반면, 처음 들었던 그 짧은 말과 책에 대한 기억은 3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 명료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나에게 어색한 것이었다. 그 시절 대학생 남녀의 만남에서 서로서로 어설픈 독서 화제는 주 메뉴였고, 독서량이 많지 않았던 나는 그게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래선지 그 뒤 도서관에 꽂혀 있는 '어린 왕자'를 숱하게 보았지만, 기껏 뒤적여봐야 보아뱀 이야기 부분을 넘기지 못했다.

그녀와는 몇 차례 더 만났다. 내가 제안하는 걸 어쩐지 잘 받아들였던 그녀는 걷자면 걸었고, 띄엄띄엄 길게 이야기했고, 기타치고 노래 부르자면 또 그렇게 했다. 그것도 캠퍼스에서.

밝고 총명한 인상의 그녀가 싫지 않았고, 그런 내 모습을 같은 과 친구들이 한번 쯤 봤으면 하는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어색하게 시작한 만남이었다. 그 느낌은 왠지 계속 됐고, 내가 그 다음 약속을 잡지 않으면서 만남은 끝이 났다.

 

27년 후 그저께,

창원의 한 서점에서 나는 그 책의 보아뱀 부분을 훌쩍 넘겨 읽었다. 아홉살 호준이가 만화책을 뒤지고 그 옆 레고장난감을 뒤지는 사이에.

바오밥나무 이야기가 어느 부분에 나오는지도 알게 됐다.

호준이는 처음 사려고 했던 만화책 5권 가격의 레고장난감을 집어들었고, 어쩐지 나는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어린 왕자'와 함께 계산대에 올렸다.

서점 위 샌드위치 집에서 한 시간 만에 그걸 다 읽었다. 준이는 레고를 맞추고.

왕자의 별 이야기와 꽃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별을 떠난 이야기. 왜 떠났을까... 꽃에게 상처를 받은 듯했는데 이해가 잘 안 됐다.

그리고 소행성 이야기. 왕자는 받아들여질만한 명령만 하는 홀로 사는 왕과 허영쟁이와 술꾼, 계속해서 별을 세며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장사꾼...1분마다 가로등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며 잠들고 싶어하는 가로등지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탐험가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만 책을 쓰는 지리학자를 만난다.

이윽고 지구에 도착해 지구에 사는 111명의 왕과 7000명의 지리학자, 90만명의 장사꾼과 750만명의 술꾼과 3억1100만명의 허영쟁이를 만나는 대신에 뱀과 꽃과 여우와 철도원, 그리고 비행기조종사를 만나는 어린 왕자.

'길들여진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나는 그 꽃을 책임져야 하니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별을 바라보지만, 모두에게 같은 의미는 아니에요.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빛일 뿐이지만 여행객에게 별은 길잡이가 돼 주잖아요. 학자에게는 연구 대상이고 장사꾼에게는 별이 황금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하지만 별은 말이 없어요. 아저씨는 누구도 갖지 못한 별을 갖게 될 거예요.'

나는 소설의 본문보다 그 뒤 작가의 연보가 더 인상적이었다.

 

 

작가(앙투안 드 생텍쥐베리) 연보

 

1900년 6월 29일 프랑스 리옹의 귀족 집안에서 출생하다.

1912년 앙베리외 비행장에서 조종사 베드린에게 이끌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다.

1921년 모로코 제37비행연대에 배속돼 민간인 조종사 면허를 취득하다.

1922년 군용기 조종사 면허를 획득하다.

1926년 단편소설 <비행사>를 발표하다. 10월, 디디에 로라가 지사장으로 있는 라테코에르 항공사에 입사하다.

1927년 메르모즈, 기요메 등과 함께 정기우편 비행을 담당하다. 비행장 책임자로 18개월 동안 근무하며 <남방우편기>를 집필하다.

192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르헨티나 항공회사 지사장으로 부임하다.

1930년 <야간 비행>을 집필하다.

1933년 생라파엘 만에서 수상기 테스트 도중 사고가 일어나 겨우 살아나다.

1934년 에어 프랑스 입사. 이해 착륙장치 특허를 받은 것을 비롯해 생애 12개를 특허를 받는다.

1935년 <파리수와르>지 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 파견. 장거리비행 시도 중 이집트 사막에 추락, 닷새 동안 걸어 베두인 대상에 의해 구출되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위로 동원돼 정찰 비행단에 전속되다.

1943년 뉴욕에서 <어린 왕자>를 출간한다. 알제리의 정찰 비행단에 다시 편입 교섭 후 우즈다의 본대에 편입되다.

1944년 7월 31일 8시 30분, 최후의 정찰 비행에 출격 후 실종되다. 독일군 정찰기에 의해 격추되었으리라 추측된다.

 

27년 전 그녀가 고개조차 들지 않고 읽고 있었던 부분은 어디였을까.

지금, 그녀는 무얼 읽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