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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는 여행

10년전 그 골목에 갔다 - 진주성

진주성 주변 골목

 

11년 전 2006918일 자 <경남도민일보> 인터넷 기사로 골목과 사람(26) 옛 영남의 관문 진주성 일대가 실렸다. ‘진주의 골목 나들이를 고도의 발원지인 진주성에서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고 썼다.

그때는 진주성을 찾기 전에 그 앞 장어거리와 뒤쪽 여인숙 골목, 도로 건너편까지 걸쳤던 가구거리부터 찾았다. ‘솔솔솔흘러나오던 장어 굽는 냄새, 골목에 나란히 달려있던 여인숙 간판들을 소개했고, 30년 가까이 가구점을 운영했던 분도 만났다.

11년이 지난 20171125일 오전 105, 그 장소에는 모든 것들이 없어졌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시간 뒤편으로 사라졌다. 허무니 허탈이니 무상이니 하는 일말의 감정이 끼어들 틈도 없다. 그냥 완벽한 가 됐다.

 

 

 

 

 

 

 

나의 기억들.

골목 한 쪽 진주극장에서 영화 첨밀밀을 봤던 기억, 어르신들 모시고 유정장어집에 갔던 기억, 영원히 오지 않던 여자를 기다렸던 기억, 밤새 술 퍼마시고 새벽 어스럼 여인숙에 퍼질러졌던 기억. 그 모든 게 이젠 근거를 잃어버렸다.

진주대첩광장 조성사업, 25020광장·기념관·주차장 조성, 2007~2020, 보상비 600억 원 공사비 380억 원, 201810월까지 문화재 시·발굴 끝나면 착공, 담당 진주시 도시개발과 749-8911.’

장어거리, 여인숙골목, 가구거리가 있던 본성동이 마치 임진왜란 직전 진주성으로 확장돼 사라져버렸듯, 400년이 지난 이 시대에 그때처럼 말끔하게 사라졌다.

 

 

 

함께 사라진 게 있었다. 199612월 세계인권기념일에 시민 모금으로 세워졌던 형평운동기념탑이다. ·돼지를 잡는 신분이라고 차별을 받았던 백정들의 계급해방과 형평을 위해 1923년 결성됐던 진주의 형평사 운동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진주시는 진주성광장 조성을 위해 옮기자던 입장이었고, 시민단체는 옮기는데 반대해왔다. 뒤에 들어보니 단체와 시가 합의해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근처로 옮기기로 하고 1122~23일 이행했다.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아무 것도 없다. 곧장 진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진주성을 둘러보는 것도 올 때마다 다르다. 나는 10대 때와 20대 때, 그리고 10년 전 40대 때와 오늘 50대에 이르러 주의를 기울인 게 조금씩 달라졌다. 촉석루에 오르고, 의기사의 논개 영정과 그 아래 의암을 방문하고, 한참을 걸어 들어가 박물관을 보고 나오는 게 예전 패턴이었다.

오늘은 순의단을 한 바퀴 돌면서 비문 문장과 조각 하나하나 꼼꼼히 보았다. 비문 명칭이 어렵다.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 159210월의 진주성 대첩을 추앙하고, 다음해 62차 진주성 싸움 때 희생된 7만 명의 주민과 병사를 추모하는 곳이다. 조각 속의 그림은 전쟁 당시를 상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비주얼 매개다. 진주성 안에 들어오면 이 그림들을 누구나 봐야 할 것 같은데, 촉석루나 의기사, 의암에 비해 무시되는 게 아닌가? 조각의 상태도 선명하지 않았다.

 

 

 

 

 

 

 

진주성에서 오늘 처음 한 것은 창렬사 참배다. ‘諸將軍卒之位비석이 여러 장군들 위패가 모셔진 건물을 지킨다. 우리가 흔히 아는 김시민, 김천일, 최경회, 황진 장군을 비롯해 진주성 싸움을 이끌었던 장군과 병사의 위패를 모셨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 향불 하나 피워지지 않은 사당에 내가 분향을 했다. 기분이 뿌듯했다. 마치 후예가 된 듯!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전에 왔을 땐 순의단도, 창렬사도 제대로 찾지 못했을까? 진주성이란 곳이 촉석루나 논개도 중요하지만, 1~2차 싸움에서 죽어간 병사들과 백성들의 원혼을 담은 곳인데. 그냥 대충 훑어보고 지나가서 그런가? 올 때마다 목적이 달리 있어서 그랬나? 누가 시킨 것도,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훑어볼 이유가 뭐가 있나? 서두를 이유가 뭐가 있나? 이제부터는 서두르지 말고 하나라도 제대로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진주성 앞 골목들은 허망하게 사라졌지만, 뒤편 인사동 골동품거리는 10년이 지나 오히려 더 풍성해진 느낌이다. 구석구석 즐비한 장독, 다양하고도 기기묘묘한 석물에 요강까지, 10년 전 길 뒤쪽에 있던 달마상은 길 앞쪽으로 진출했다.

 

 

 

천 원짜리 놋숟가락부터 몇 억대 자기까지 없는 게 없다던 목예사 대표 심재명(당시 50) 씨를 다시 찾지는 못했다. 11년 전 만났던 분이었다. “시외로 이사 갔다는 소식만 들렸다. “골동품 하나하나에 사람 인생 같은 사연이 안 있습니꺼. 그걸 알면 그냥 물건 같지는 않지예라고 했던 분이었는데. 10년 전 사진 찍기를 마다하셨으니,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2017년 1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