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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는 여행

10년 전 창원 소답동 골목

자, 그러면 지금부터 정확히 11년 전의 소답동 골목으로 가보실까요~

 

골목과 사람(11)창원의 시작 북동 옛 창원장 골목

일천년 역사 창원부의 중심 장터 이어지던 옛 골목 흔적

이일균 기자 iglee2@dominilbo.com 2006년 05월 27일 토요일

 

조선 태종 때인 1408년, 이전의 ‘의창’과 ‘회원’이 통합되면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붙인 ‘창원부’가 들어섰다. 현재의 마산과 창원, 진해와 함안 일부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행정구역에 군사적 성격이 강조되면서 ‘창원대도호부’가 된 것만 보더라도 이 지역의 비중을 읽을 수 있다. 창원부일 때나 대도호부일 때나 그 중심은 창원면(부내면, 혹은 시기에 따라 창원읍)으로, 조선시대에 축조됐던 읍성이 그 지리적 범위를 전한다. 옛 창원장이 있던 자리, 지금은 북동공설시장이 들어선 소답동 위쪽 북동 일대가 대도호부의 중심이었다.

   
▲ 장터로 이어졌던 골목엔 옛 국밥집, 방앗간이 그대로다.
대도호부 관아의 위치는 이곳이 창원의 중심이었음을 확인시킨다. 창원문화원 박현효 원장은 “처음에 북동시장 입구에 있던 관아가 조선말 지금의 창원초등학교 자리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북동시장은 옛날 창원 장터. 관아와 장터를 중심으로 미로처럼 형성됐을 법한 골목의 기록과 흔적을 지금은 찾기 어렵다. 다만 증인들의 기억을 더듬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을 몇몇 골목을 떠올릴 뿐이다. 그중의 하나가 ‘면사 뒷골목’. 지금은 의안민원센터가 된 건물을 오른쪽으로 감아 돌며, 장터까지 연결됐던 골목이 아련한 기억을 담고 있다. 이 골목 끝에는 30년 전처럼 장터 국밥집이 있고, 그보다 더 오랜 떡방앗간이 옛 손님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6년전 이 골목에서 없어진 게 있다.

일흔아홉의 할머니는 한사코 사진 찍기를 마다했다. “이 모냥을 해갖고 무슨 사진을 찍는다는 말이고. 치아라 마!” 방 안에서도 일어서기 어려울 만큼 거동이 불편해도, 그 옛날 큰 상인의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이 골목 떡방앗간 맞은편에 국밥집을 차리고, 나중에 ‘판문젼이라는 간판을 걸었던 손모예 할머니다.

옛 창원읍의 중심에 창원장이

이 집 쇠고기 석쇠구이의 전통이 지금 창원 서상동의 ‘임진각’, 도계동의 ‘판문젼 등의 식당에 남아있다. “처음엔 그냥 ‘시장식당’이었제. 나중에 고속도로 공사하러 온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라고 여를 자꾸 ‘판문젼 ‘판문젼 하더라꼬. 그래서 그 다음부턴 판문점이 됐제.”

이곳의 고기 맛이 기가 막혀 ‘사람고기를 넣었니 말았니’ 하는 등 갖은 풍문이 돌기도 했다. “구이도 그렇고 육회도 그렇고, 그냥 처음엔 국밥 하다가 손님들이 찾아 만든 거 아이가. 별의 별 소문이 다 있었제.” 그러나 결론은 “다 여기 창원장이 커서 장사가 잘 됐던 거 아이갚였다.

양쪽으로 몇몇 기와집과 슬레이트집이 이어졌었던 좁은 골목. 그 골목엔 판문점뿐만 아니라 지금의 할머니국밥집이나 창원떡방앗간 같이 대를 잇는 명물들이 일찌감치 이름을 날렸다. 동사무소 근처에서 벌써 시작되는 약재와 보신재 전문 점포는 지금도 스무집 가까울 정도로 골목 주변에 집중돼 있다. 그만큼 창원장으로 통하던 이 골목의 끗발이 보통이 아니었던 셈이다.

선친으로부터 떡방앗간을 물려받은 50대의 여 주인은 “이 골목에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다녔다는 거 아입니꺼. 장터 때문이지예. 장터 이쪽 골목은 시카고, 저쪽은 모스크바, 이런 이름도 있었다 캉께네. 뜻도 잘 몰라. 잘 나갔다는 기지.” 손 할머니와 같은 말이었다.

   
▲ “보신재 골목은 여기가 최고야” 창원 개소주집 이연자씨는 당당하다.
판문점, 할매국밥 명물들 ‘즐비’

국민학교 다닐 때 이곳 방앗간으로 이사했다는 그는 50년 전 장터의 위치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방앗간 맞은편에 들어선 공설시장이 장터. 아래쪽에 닭전 개전과 장작을 내놓던 나무전이나 대장간이 있었고, 위쪽에 쌀전 고기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장터 아래쪽 도로에 스무집 가까운 보신재 약재 점포가 들어선 것도 옛날 개전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신재는 개소주와 개고기, 흑염소 잉어 붕어 가물치 장어 등을 중탕해 주고, 약재로는 인삼 녹용 상황버섯 등이 간판을 채운다. 마산 창원, 진해 일대에서는 가장 큰 규모. 옛 창원장의 명성을 가장 오래 간직한 이곳 약재 골목의 사연은 인수한 지 28년 된 창원개소주 이연자 대표가 전했다. “‘약재’ ‘약재’ 쌌는데 그거하고 보신재는 달라요. 개고기나 염소, 고기 중탕으로 몸을 보양하는 거야. 구분을 잘 해야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만큼 전문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긴 그래도 가게마다 전부 개고기나 약초 같은 걸 하니까 사람들이 알아요. 하나 둘 들어선 지가, 한 30년 됐을 거야. 그전에 여기에 닭전 개전이 있었다니까 영향을 받았겠지 뭐!” 재래시장이 죽어도 특화된 골목은 산다는 이야기다.

옛 골목의 현대식 건물 ‘애물단지’

“재래시장을 어떻게 살리느냐고? 내가 그걸 알면 여기 있어요? 몰라 그런 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비결을 아는 듯 했다. 그렇게 북동공설시장 주변 골목을 몇 바퀴 돌았다. 그런데 만나는 시장 상인들마다 입장이 똑 같은 게 하나 있었다. 3~4년 전 창원시가 수십억의 예산을 들여 만든 이곳 공설시장의 역할에 대한 불만이었다.

“지금 이 근처엔 장사 안돼. 공설시장 들어서고 나서 더 안돼. 옛날 장터보다 사람들이 더 안 온다”하고, “오히려 차가 다니는 아래편 도로 쪽에 사람들이 다 많이 모인다”는 것이다. “앞쪽 셔터문은 왜 닫아 놓는냐. 어쨌든 사람들 하나라도 더 출입을 시켜야 되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했다.

옛 장터를, 옛 골목을 없애며 들어선 현대식 건물이 지금도 ‘애물단지’ 신세를 면치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고목’을 함부로 베지 않았다. 창원대도호부가 들어섰던 해가 1500년, 멀리 의창과 회원이 창원으로 통합되고, 이곳 북동이 중심의 역할을 했을 때가 1300년. 그렇게 긴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자연스레 모아왔던 창원 장터에서 지금의 현대식 건물은 겁을 먹은 채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골목과 사람(12)동요 <고향의 봄> 시초 창원시 소답동 길

울긋불긋 꽃대궐…그때가 그립습니다…

이일균 기자 iglee2@dominilbo.com 2006년 06월 03일 토요일

여섯 살 소년 이원수는 매일 창원시 중동 599번지 집을 나서 인근 소답동 새터의 서당으로 향했다. 집을 나서 창원읍성의 동문(향양루)을 지나면 개울에 수양버들 늘어지고, 마을길 돌담너머 복숭아꽃 살구꽃이 아름다웠다. 즐비했던 소답동의 천석꾼 집 중에서도 김해 김씨 고가는 대문 앞 아름드리 정자나무로 더욱 돋보였고, 남쪽 들판의 보리는 누렇게 익어갔다. 고향의 정경을 차마 잊을까 두려웠던 소년 이원수는 열여섯의 맑은 눈으로 고향 중동과 소답동을 시로 지었다. ‘고향의 봄’이라는 제목이었다.

   
▲ 위에서 바라본 소답동 길 전경.
△창원읍성 동문 주변엔 지금도 전통 골목이

이원수(1911~1981)의 회고록 ‘흘러가는 세월 속엷에서도 사뭇 달랐던 창원읍성 안팎의 정경이 드러난다. 읍성 안은 장터와 가옥, 좁은 골목으로 언제나 붐볐다. 그가 살았다는 중동 599번지는 지금 재건창원교회 맞은편으로 슬레이트집이 됐다. 북동의 옛 창원 장터와 멀지 않다. 이곳에는 지금도 북동11길, 북동12길 등 북동과 중동을 잇는 좁은 골목이 많이 남아있다. 그가 드나들었던 동문은 지금의 ‘소답떡방앗간’ 자리다. 읍성의 반대쪽 서문은 흥한웰가 입구의 동정동사거리, 북문은 북동시장 위에 있었다. 1467년 조성 성종 때에 만들어졌던 읍성은 해방 이후까지 흔적이 남아있었다.

소년의 눈에는 서당 가는 길에 본 성 바깥이 더욱 끌렸던 모양이다.

고향의 정경 시로 표현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지고….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다.’ 그가 다닌 서당마을은 고향의 봄 가사 속에서 ‘꽃동네 새동네’로 표현된 새터 마을. 지금은 조각가 김종영 선생의 생가가 있는 소답동 131번지 일대다. 이 가옥은 이전부터 김해김씨의 고가로, 봄이면 복숭아꽃 살구꽃 지천이었던 ‘꽃대궐’이었다. 그래서 소년이 살았던 중동에서 김씨 고가로 이어지는 길은 지금 ‘이원수1길’부터 ‘이원수8길’까지 블록별로 이름이 붙여졌다.

북동-중동-소답동으로 이어졌던 옛 창원읍 길은 훨씬 오래전부터 간접적으로 묘사됐다.

   
▲ 현재 옛 이원수 선생집에 거주하는 이순조 씨.
현재 ‘이원수 길’ 로 호칭


조선 세종 때의 경상도지리지 창원부 대목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한다. ‘토지가 기름지고 수천(水泉)은 얕다. 사람들은 거칠고 모질며 말다툼을 잘한다. 농사를 부지런히 하였다.’ 기록한 이의 귀에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이 마치 싸움하듯 들렸으리라. 당시 창원의 중심이 읍성 안팎이었으니 이런 특징을 묘사한 지역도 북동-소답동 길과 일치할 듯 하다.

어느 이야기든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사람들 기질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원수의 옛 집 골목을 따라가면 나오는 재건노인회와 여성노인회 사랑채에 모인 할머니들이 그랬다.

△분명히 알아야 “안다”고 말해

대부분 60~70대인 할머니들에게 50년 전 이 골목의 모습을 말씀해 달라 했지만 “정확하지 않아서 말 못한다”는 이야기만 10분 넘게 반복됐다.

가물가물한 50년전 기억

딱히 50년이 안 되더라도 옛 모습을 전해주면 되는데 누구는 중간에 이사를 와서, 또 누구는 시집온 동네라서 분명하지 않다는 논리다.

“아따, 신문에다 함부로 이야기하먼 돼요?” 한두 분 추천해달라는 말에도 그들의 심사는 엄격했다. 누굴 추천하면 곧바로 옆에서 “그 양반은 안 되지, 시집왔다 아이가!”하면서 저지했다.

그런 완강한 등쌀에 정작 이원수 선생의 옛 집에 지금 살고 있는 이순조(58) 아주머니가 자신 없이 나섰다. 동생뻘인 데다가 그녀도 이 집에 시집을 왔기 때문이다. 물론 옛 이야기를 잘 몰랐던 탓도 있었다.

“애 아부지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 잘 몰랐어예. 무슨 유명한 사람이 살았다꼬.” 그는 인근 서상동 고향의 봄 도서관에서 만든 자료사진을 보고서야 “여, 진짜 우리집 맞네!”했다. 그때서야 장소를 노인당에서 집 앞 골목으로 옮길 수 있었다.

   
“온통 초가집과 골목뿐”


“내 나이 오십여덟인데 열여덟살 시집왔을 때부터 여서 안 살았습니꺼. 처음엔 초가였는데 몇 년 뒤에 쓰레트로 바깠어예. 첫 아 들쳐업고 밥해주고 했으니까.” “그때는 전부 다 초가집이었지예. 요 앞에 도로 예? 없었지예. 다 골목이었고, 집이었지예. 신작로는 그때 창원장에서 바로 그 밑으로 쭈욱 내리갔지예.” “그참, 그래 유명한 사람이 여 살았어예? 집터가 좋은가베. 우리 아 들도 유명해질랑가 그라먼…. 호호호” “친정도 중동이라예. 저 웃동네지만. 옛날 동네모습 예? 와 이리 기억이 안 나노? 노래야 들어봤지만 여 노랜지 우리가 어찌 압니꺼. 옛날 동네 경치 좋았던 것도 잘 모르겠고. 맨날 일 댕긴다꼬 바빴고, 나 들어 다리가 아파지고 나서는 경로당 댕기고. 경치 그런 거 못봤습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