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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는 여행

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 창원 외동

창원병원 옆 외동 골목을 기억하는 이가 지금 있을까?

 

지금 이 시기에는 온 천지가 유채꽃 밭이 되는 이곳에서 150집이 넘고 3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던 15년 전 외동마을을 떠올릴 수 있을까?

 

골목 끝 당도산을 넘으면 내동마을이 나왔고, 그래서 외동이라 이름 붙여진 마을. 1980년대와 90

 

년대 가난한 슬레이트 지붕의 이 동네는 얼기설기 2030개가 넘는 단칸방을 만들어 창원공단

 

노동자들에게 세를 주면서 달동네라고도 불렸다.

 

11년 전 2006<경남도민일보> ‘골목과 사람취재를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땐 철거작업이 거의 마

 

무리될 때였다. 집 있고 땅 있는 사람들은 인근 중앙동이니 토월동이니 사파동이니 하며 다들 옮

 

겨갔지만, 마땅히 오갈 데 없던 사람들은 황량한 마을의 끄트머리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여든한 살 김 씨 할머니도 그중 한분이었다. 혼자 살면서도 사람들 만나봐야 세상 욕밖에 더

 

하겠냐면서 근처 경로당도 찾지 않던 분이었다. 그분 소식은 과연 들을 수 있을까?

 

동네 입구에서 가게 하던 황 씨 집 장모 같은데. 그때 이 양반이 가족들하고 같이 이사를 안 갔

 

? 돌아가셨겠지. 그때 벌써 팔순 넘었다면서?”

 

당도산 언저리 법성사 절 앞에서 칠순의 김 씨가 전한 이야기다.

 

 

 

 

외동마을에서 태어나 지금 사는 인근 중앙동까지 이 일대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김 씨의 기억은

 

긍정적이다. 흔히 짐작되는 회한이니 허무니 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집도 농토도 빼앗기듯 쫓겨났지만 후회는 안 하요. 집하나 얻어 갔으면 됐지. 내 하나 희생해서

 

나라가 이만큼 나아졌다 아이가.”

 

아파트 들어선 것보다는 안 낫나? 동네 흔적은 남아 있응께. 집 있는 사람들은 처음엔 토월동 사

 

파동 봉곡동으로, 나중에는 옆에 중앙동에 단지를 만들어 이사를 갔지.”

 

 

 

 

 

하지만 사람들 속이 어디 다 그렇게 똑 같을까.

 

날 더울 때 유채밭에서 나는 꼬롬한 향기처럼 속이 꼬였던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제대로 이주한

 

사람들은 집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70% 정도였다니 더 그럴 것이다.

 

억울치. 나는 내동 살았는데 70년대 말에 박통한테 땅이고 집이고 진짜로 뺏기다시피 안 했소.

 

지금은 요서 노점하고 있지.”

 

예순 두 살 김 씨 말은 달랐다. 사연이 있었다.

 

벚꽃 필 때는 옛날 내동 있던 기능대(현 폴리틱대학) 앞에서 노점 하고, 지금처럼 유채꽃 필 때는

 

여서 하요. 좀 있다 5월 달 되면 가음정동 장미공원에 가야지. 여름에는 저 동해로 가서 낙산이나

 

경포대 해수욕장서 또 하고. 가을 되면 또 여기로 오지. 코스모스가 좋거든. 겨울에는 상남동에서

 

호떡 팔고.”

 

그래도 가족들 입에 풀칠 할라카먼 한 달에 200은 벌어야지. 그래서 장사 안 될 때는 대리기사

 

안하요. 내가 젊었을 때부터 시내버스 기사를 했거든.”

 

3000명이 넘던 외동마을 주민들이 어디로 옮겨갔는지도 말했다.

 

“3분의 2가 세입자들인데 그걸 어떻게 아노? 그중에서 운 좋은 사람들은 개나리아파트 임대로 갔

 

. 그것밖에 몰라.”

 

 

 

 

칠순의 김 씨는 골목이 사라진 지금의 외동 유채밭을 보면 뿌듯하다고 했다. 발전을 실감한다고

 

했다.

 

예순 둘의 김 씨는 골목이 사라진 지금의 유채밭 한 쪽에서 노점을 한다. 커피와 음료수, 핫도그를

 

판다.  - 2017년 4월 21일.

 

 

다시 2018년 2월 17일.

10년전 찾았던 외동골목 입구 자리에 '외동옛터' 비석이 섰다.

그때 동네 입구 김씨 할매처럼 늙고 힘없어 보이는 할매가 비석처럼 앉아있다. 그런데 앉은 자리가 이상하다. 처음엔 전기휠체어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가만 보니 장바구니차, 작은 캐리어다. 거기에 짐을 넣어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앉아 있다.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조금씩 움직인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여기서 뭐하세요? 안 추우세요?" "바람씌고 안 있소..."

"이 동네에 사신지 오래 되셨어요?" "저는 10년전에 여기 온 적이 있는데 그때도 사셨어요?"

"그땐 여기 안 살았지. 10년전엔 여기 안 살았소."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원위치로 거둔다. 망연히 앞만 바라본다. 그리고 5분쯤 있다가 아주 조금 앞으로 움직인다.

그러고보면 나는 40년 전에도 여기 왔다. 친구 자취방이 있었고, 그땐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8달전 여기 오고 쓴 글에서 법성사는 법청사가 정확한 이름이다.

 

 

골목과 사람(14)공단개발에 가린 창원의 뒷골목 ‘외동’

고품격 도시 만드느라 슬레이트집도 골목도 ‘스르르’

이일균 기자 iglee2@dominilbo.com 2006년 06월 17일 토요일

 

△마을 앞 신작로는 옛날 마산-창원 국도


창원대로와 연결되는 마을 앞 소방도로는 상징적이었다. 구멍가게와 과일가게, 대폿집 유리점 이어지

 

던 길은 사람을 모으고 마을을 열었다. 1970년대에 창원대로가 생기기 전에는 이 길이 마산 방향에서

 

창원 상남동 쪽으로 차가 다니던 국도였다 한다. 지금도 그 길 끝에는 ‘공단 유리젼이 낡은 간판을 달

 

고 있다. 주인은 “장사한 지 20년 됐는데, 그때부터 철거이야기가 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 20년 넘게 마을입구 신작로의 구멍가게에 살고 있는 김모 할머니.
그에게 공단으로, 혹은 아파트나 상업지역으로 개발된 주변과 달리 외동이 지금까지 촌락의 형태로

 

남아있는 이유를 물었다. 개발된 창원 속에서 전통 촌락으로 남았던 이유, 혹은 개발의 틈바구니에서

 

배제됐던 배경이 궁금했다. “여기가 옛날부터 도시계획 상의 공원지역 아니냐. 공원 만들어서 무슨 이

 

익이 남겠느냐. 우선 돈 되는 택지나 상업지 개발부터 하다 보니까 밀렸겠지.”

그 말에 다른 주민이 토를 달았다. 사람 드문 곳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지자 슬쩍 접근했던 터였다. “10

 

년 전엔가 대방동 어데 하고 바꾸자는 제안을 시가 했는데 땅 주인들이 안 받아들였다 카데예.” 왜 이

 

땅이 공단과 아파트, 대규모 상업지와 대로 사이에서 촌락의 모양을 했는지 마치 몇 개 맞춘 퍼즐 같았

 

다. 윤곽만 잡혔다.

 

“공원 만들어서 무슨 이익 남겠어 돈 되는곳 개발하다 보니 밀렸지”


창원시는 이 마을 일대를 지난 1977년 도시계획시설 중 ‘공원지역’으로 지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름

 

은 ‘대상 공원’이다.

 


   
△회색 슬레이트집에 붙은 철거 계고장


“옛날에는 통만 세 개에다가 유권자 숫자만 2,000명이

 

넘었다 카데예.” 20년 전에 일을 시작했다는 유리집 주

 

인이 그렇게 표현했으니, 그 이전이겠다. “철거 직전에

 

모두 119가구에 건물 수만 350개를 넘었다는 시의 통

 

계가 있었다”고 기자가 말한 뒤 나온 답이었다. 몇 가

 

구니, 건물이 몇 채니 하는 설명보다 왠지 생생하게 들

 

렸다. 이 마을을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3년 전부터 보

 

상이 이루어지고, 지난해 9월부터 철거가 시작됐다.

아직 남은 슬레이트 집 하나에 철거 계고장과 대집행장

 

이 나란히 붙어 있다. ‘송달일로부터 20일 이내에 철거

 

바람. 미이행 시 시가 스스로 집행하거나, 제3자가 집

 

행하게 하고 그 경비를 부담시키겠음-2005.9.1. 창원시’라고 씌었다. 대집행영장의 발부 시점은

 

2006년 3월7일로, ‘집행일시 4월4일 10시, 14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집행영장은 ‘평소 고품격도시

 

창원 건설에 협조해주신…’이라는 내용의 하얀 종이 위에 붙여졌다. 집집마다 검은 스프레이로 ‘4.4’

 

‘4.14’ 등으로 날려 쓴 글자는 철거예정일이었다.

주민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세입자들은 먼지처럼 흩어졌다고 했다.

 

세입자 쫓겨날 날 기다리는 신세


 

“땅 주인들이야 처음부터 여기 살지 않았거나 새로 집 지어갖고 갔지예. 세입자들이야 어데로 갔는지

 

알 수 있어야제. 몇백씩 이주비 받고 능력되면 이사 가고, 능력 안되면 지금 저래 남아있는 거제.” 마

 

치 아직 뼈대가 남은 골목과 스무 채의 슬레이트 집처럼.

 

△난 갈데 없어. 어디로 갈지 몰라.


김모(81) 할머니는 그런 상황에 대처하기를 포기한 듯 눈빛이 허했다. 20년 넘게 지켜온 마을입구 신

 

작로의 구멍가게에 아직도 살고 있지만 셔터를 내린지는 오래됐다. “넘들 욕 하기 싫어서 노인당에는

 

아예 안 간다”는 할머니는 하루 종일 가게 앞 평상에서 그냥 앉아 있다고 한다. 가끔 사람이 지나가고,

 

조금 떨어진 유리집 젊은 양반들 이야기가 거기까지 들린단다.

 

“뭣 때문에 그렇게 댕기 쌌는데? 다 지났는데 뭐하로 왔는데?” 왜 보상과정에, 철거과정에 오지 않았

 

느냐는 추궁부터 시작됐다. “이주비? 받았는데 그게 어데갔는지 모르겠어? 가족? 난 그런 거 없어. 혼

 

자 살아. 언제 이사갈지, 어데로 갈지 그런 것도 없어. 그냥 그전에 살던 대로 하루하루 보내는 거 아이

 

가!”

 

대충 이야기가 끝난 듯하자 할머니는 갑자기 일어서서 노인당 쪽으로 향했다. 노인당에는 안 간다고

 

하셨는데? 거기서 한 서른 걸음쯤 떨어진 곳에 노인당이 있다. 그런데 노인당 나무판자 문에는 녹슨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오후 여섯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