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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는 여행

10년전 그 골목 - 통영 서피랑 2017년

11년 전 2006년 가을 통영에 왔을 때에는 무전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서호시장에 갔다가 서피랑에 갔다. 통영농협 옥상에서 바라본 서호시장의 새벽 활어시장과 대장간, 시락국집을 먼저 찍고, 서피랑 입구 서문고개에 섰었다.

11년이 흐른 2017929일 아침에는 광도면으로 옮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서호시장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가 서문고개 입구에서 내렸다. 서호시장의 활기생기보다 서문고개에 새겨진 박경리의 이 먼저 생각났다. 길 오른쪽 세병관, 통영문화원을 지나치고 곧바로 서문고개 입구에 섰다.

 

 

서문고개 입구.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3장 원고지를 그대로 옮긴 새김비가 있다.

 

 

-“가자. 죽으나 사나 가야제한실댁은 코를 풀고 멍멍한 소리로 말하며 마당으로 내려와 용란의 손을 잡았다.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와 그들은 서문고개를 넘는다. 용란이 친정으로 올 때마다 이 고개를 울먹울먹 넘어가는 한실댁은 양지기만 같았다.-

골목 입구에 새겨진 박경리의 은 그대로다. <김약국의 딸들> 3요조숙녀편 한 대목이다. 이 대목을 두고 11년 전 나는 이렇게 썼다.

-아편쟁이 남편한테 매 맞고 도망 온 셋째 딸을 친정 어무이가 고개 너머 살림집으로 데려다주는 장면이다. 큰딸은 과부에 영아살해 혐의까지, 머슴을 사랑한 셋째는 발광을 했고, 넷째 용옥은 배가 뒤집혀 죽었다.-

 

나는 이 글을 쓴 뒤 2008년에 <토지>를 읽었다. 특히 여자의 운명에 모질고 독한 박경리의 펜 끝은 여기서도 윤씨 부인에게, 별당아씨에게, 월선에게 향한다.

-‘이년아! 내 죽은 지 몇 달 되었다고 사내 맞을 생각을 하노! 무덤 위 띠잔지에 부채질하는 년보다 한 술 더 뜨는고나, 몹쓸 계집!’ ‘야아 맞소. 나는 몹쓸 계집이오.이녁 생시 적부터 몹쓸 계집이었소. 길손 오는 언덕길만 쳐다보믄서 살았이니께요. 죽어서 이내 몸이 천 조각 만 조각 난다 해도 잊을 수가 없었소. 내 육신이 썩고 넋이 허공에 뜬다믄 모를까 잊을 수 없었소.’ 그렇게 죽은 인()이 아낙은 결국 환이 앞에 선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나왔십니다.” “부끄럼이나마나 말해보시오. 어려운 일 있으면 도와드리겠소.” “지는 애당초부터 기생이 됐어야 할 팔자를, 잘못 길을 들었십니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믄은 세상에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겄소?”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요.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하자는 게요? 그건 어렵잖은 일이오면 일행이 있어서 거북하군.” 다음 순간 환이는 여자를 떼밀어젖힌다. 여자는 나자빠지면서 몸을 모로 눕힌다. “싫은 계집이 달라붙으면 죽이고 싶더구먼. 왜놈의 배때기를 찌르듯이, 미칠 지경으로 밉더군.” 뚜벅뚜벅 걸어간다. 돌아보지 않고 마을을 향해 걸어간다. ‘저 계집은 목을 매달겠지. 한 계집 살리려고 잡놈 될 생각은 한푼 없다.’ 인이 아낙은 다음날 목을 맨 채 발견됐다.-

 

왼쪽 빨간 벽돌집이 문화동 328-1번지 박경리 생가.

 

서문고개 먼당, 일명 뚝지먼당, 지금은 서피랑으로 부르는 고갯마루에 박경리 선생 생가가 있다. 가난한 고개마을, 선술집에 사창가까지 딸려 야마골이라 불렸던 이곳에서 아들을 낳지 못한 박복한 여자의 딸로 자랐던 박경리, 진주여고 졸업 후 결혼을 했다 전쟁 통에 남편과 아들을 잃었던 박경리, 딸 하나 데리고 살면서 재기에 몸부림쳤으나 결국 고향을 등지고 다시는 찾으려 하지 않았던 박경리의 정서는 그렇게 때를 놓친 정염의 여인들에게 잔혹했다. 그런 박경리가 죽기 전에 썼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사라졌다. 먼당에서 만났던 10년 전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 쓰레트 집들도 하나같이 사라졌다. 싹 깎아버린 먼당에는 길이 남고 잔디가 남고 공원만 남았다. “슀다 가지 와?” “쏘주 한잔 하고 가소!” 그런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허무했다. 썰렁했다.

 

서문고개 능선 뚝지먼당. 사람들도 집도 사라졌다. 멀리 보이는 서피랑 정상 서포루까지 공원이 조성됐다.

 

먼당 꼭대기 서포루에 이르러서야 사람을 만났다. 중앙동에 산다는 60대 여성. “하도 운동을 안 해서 한번 올라왔는데 되네예” “박경리예? 저 밑에 생가가 있다 아임미꺼. 그거 말고는 몰라예. 우리야 뭐 살기 바빴지.” “이쪽 동네야 훤하지예. 여 밑에가 명정동, 저쪽 바다쪽이 서호동, 또 이쪽이 중앙동, 저 밑에는 태평동. 여기서는 다 보이지예!”

나야 여기다 박경리 이야기며, 글이며, 사연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만 그 동네 사람들에게는 그 동네 이야기가 있고, 그 사람들 자신의 이야기가 있는 법. 그 사실은 먼당 아래 명정동 노인회관에서 분명해졌다. 이곳 할머니들이 3년전 박경리학교라고 한글학교를 1년간 다니고는 이렇게 시를 썼다.

별명 이정숙. 내 별명은 강냉이/ 젊어서 먹고 살 길 막막해서/시작했던 일/ 섬마다 강냉이 튀박하러/ 다니며 살아낸 아픈 세월/ 사람들은 진짜/ 나를 부를 때 이름 대신/ 강냉이라 부른다 그래서/ 그 이름/ 들을 때마다 아프다/ 진짜로

 

 

 

 

눈 수술 받던 날 조순. 언제부턴가/ 안개가 뿌옇게 덮인/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젊어서 모진 고생하다/ 볼 꼴 못 볼 꼴 보아서/ 그랬을까/ 젊은 시절로 돌아갈/ 예쁜 것만 보고/ 바른 것만 보며

약간은 작위적인 느낌이 들어서 회관으로 들어가 할매들에게 여쭸다. “이 시들을 할무이들이 쓰신 게 맞습니꺼?” “그라먼! 우리가 썼지 넘이 썼이까?” 당장 호통이 돼 돌아왔다. “3년 전에 경상대 이런 데서 학생들이 1년 동안 한글학교를 했다 아이가. 거기서 한글공부 열심히 해서 우리가 쓴 거 아이가.” 그래. 약간의 작위적 느낌이 든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순가. 글 속에 할매들 인생이 선한데.

서피랑 할매들 인생은 여기만 있는 게 아니다. 명정동 쪽 큰길로 내려가니 군데군데 최용길’ ‘하금연’ ‘김순례하며 할매 할매들 얼굴 사진과 인생 이력을 찰지게 써 붙여놨다.

 

 

 

점심을 서호시장 시락국집에서 먹을까 하다가 서피랑 이야기를 마저 들으려고 서피랑맛집에 들어갔다. ‘돼지머리국밥 4500, 3000돼지국밥 값만 보통 6000~7000원 한다는 통영에서 반 동가리다. “주로 먹으러 오는 분들이 인력시장 분들이세요. 그런데 어떻게 비싸게 팔아요. 국밥은 5000원 넘지 않고, 수육에 소주 한 병, 국밥 작은 것 먹으면 15000원 넘기지 않는다는 컨셉으로 하고 있어요.” 부산 살다 통영 온 지 6년 됐다는 사장 아주머니 인심이 돼지국밥집에 딱 어울렸다.

 

그리고 터덜터덜 서호시장에 닿았다. 아침시장의 활기는 사라졌다. 예전의 대장간도 그 수가 줄었다. 시락국집은 여전히 번성해 국밥 가격이 밥 같이, 밥 따로 구분 없이 5000원이 됐다. 그 풍경을 통영농협 옥상에서 볼 수 있는 건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통영농협 옥상에서 본 서호시장 입구. 11년 전과 달리 아케이드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