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동피랑 2017년
아침시장은 서호시장, 저녁시장은 중앙시장이라고 했다. 통영 사람들이.
2017년 9월 29일 오후 2시께 동피랑 입구 중앙시장은 그야말로 ‘뽁짝뽁짝’, 손님들 대부분 관광객이다. 동피랑이 이렇게 전국 관광객들을 모으는 건가? 동피랑 입구 계단 찾기도 어려울 정도다. 힘들게 동피랑 벽화골목 입구를 찾았다.
입구부터 감탄했다. 11년 전 초라했던 동피랑 골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참, 어떻게 벽화를 그릴 생각을 했는지? 벽화를 그린 게 또 어떻게 달동네에 천지개벽을 가져온 건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벽화골목 입구 계단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숨을 돌렸다.
감탄도 잠시…. 벽화골목 입구를 돌아나가자 말자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골목이 사라져버렸다. 그 대신 폭이 10m도 넘어 보이는 대로가 동네를 관통했다. 그리고 양쪽으로 늘어선 커피숍과 카페들. 아하, 여긴 이제 동피랑 골목이 아니라 거리구나 거리….
그나마 남은 건 대로로 절개된 동피랑 먼당 40여호와 그 사이 골목이다. 골목 안쪽 40여호도 대부분 간판을 걸었다. ○○카페, ○○○커피숍, ○○그림가게, 가정집 철제 대문 앞에도 수제버거 안내판을 설치해 놨다. 가정집은 몇 되지 않았다.
이거 어쩌나? 10년 전에 만났던 할매 집은 그대로 있나? 할매는 여기 계시나? 집 위치가 어디였지? 자꾸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정확히 11년 전 2006년 11월 20일 자 <경남도민일보> 기사를 찾았다.
‘헉헉거리며 고갯마루에 올라서야 그 사연을 만났다. 끝까지 이름을 밝히기도,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거부했다. 멀리 세병관이 바라보이는 자신의 쓰레트집 빨랫줄 쪽으로 뒤돌아서서 널려진 옷을 괜히 만졌다.’
고갯마루! 위쪽이다. 올라갔다. 동피랑 먼당 ‘동포루’ 바로 아래에 10년 전 사진과 비슷하게 생긴 집이 있었다. 여긴 갑다. 집 구조도 비슷하다.
“여기 집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한 집처럼 보이제. 사실은 세 채요. 맨 안집이 내 집이고, 다음이 우리 친정 어무이집, 그 옆이 우리 올케 집이요.”
당장 들어가 보고 싶었다. 가운데 집에서는 라디오와 누군가 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까지 새나왔다. 하지만, 집 밖에 안내판이 있다. “일반 시민이 사는 곳이니 정숙해주시기 바랍니다.” 할 수 없이 낮은 담장 밖에서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외쳤지만, 라디오 소리에 묻힌 건지 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뒤돌아섰다. 10년 전 그 할매를 만나지 못하는 구나….
사람을 만나지 않는 골목 취재는 의미가 없다. 내가 보고 느끼고 써 제끼는 데 그친다. 그 ‘찝찝함’을 달래려 들어간 곳이 ‘바리스타할머니집’이다. 손님이 줄을 잇는 근사한 카페나 커피숍과 달리 바리스타 할머니 혼자 앉아계셨던 것도 구미를 당겼다. “바리스타시네예? 커피는 방금 마셨고, 아이스티 한잔 주실랍니꺼?” “그라먼예. 경치좋은 베란다 쪽으로 앉으이소.” 됐다. 술술 풀리겠다.
“할무이는 언제부터 이 동네 사셨어예?” “여기서 나고 자라고 시집가고 안했소. 토배기지.” “그래예? 그라먼 이 동네에 벽화가 그려진 사연도 아시겠네예?” “알다마다. 10년 정도 됐지. 2년에 한번 벽화를 다시 그리는데 벌써 다섯 번째 그랬으니까.” 아하, 내가 2016년 이 골목 취재 온 직후에 시작됐구나. “그 전에 1~2년인가 푸른통영21 윤미숙 국장이 계속 동네사람들 설득을 안 했나. 벽화를 그려서 동네 한번 살려보자꼬. 쫓겨나고 또 쫓겨나고 하다가 결국 그리게 했지. 나도 그때 그리라 캤다 아이가.” 윤미숙 씨가 누군가! 통영·거제 환경운동연합 간사에 통영 연대도 신재생에너지타운 조성 주역이 아닌가. 그 이름 앞에 ‘동피랑 벽화의 산파’라는 수식어가 또 붙는다.
바리스타할머니 박부임(67) 씨 증언이 계속됐다. “윤 국장이 여기 관리할 때만 해도 확실했지. 3년 이상 거주를 안 하면 가게를 못 열게 했거든. 그런데 윤 국장이 시청서 짤리삐고, 지금 보소. 큰 길 위 마흔 집중에서 외지인이 차지한 가게가 스무 집을 안 넘나. 어떤 사람은 세 채 네 채를 사갖고는 가게를 잇기도 하고, 세만 받고 안 사나. 개판이다. 동네 모임을 해도 원주민 외에는 잘 안 나온다.” 뒤에 만난 성병원 한산신문 편집국장은 그래서 “동피랑은 실패한 마을개발 사례”라고 일축했다. “마을은 개발됐는데, 원주민들 대부분은 자본에 밀려 쫓겨났다”는 것이다. 그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여 왔네. 아까 말한 맨 윗집 할매, 이양순(80) 할매! 아참, 10년 전에는 얼굴도 이름도 못 내게 했다 캤제. 지금은 괜찮을 끼요. 사흘들이 ‘테레비’에 나오는데 뭐.” 반가웠던 나는 이양순 할매한테 10년 전 기사도 보여드리고, 얼굴을 뒤로 감춘 사진도 보여드렸다. 하지만 동피랑 벽화 때문에 방송을 많이 탔다는 할매는 그래선지 기억도 못했다.
왼쪽이 박부임, 오른쪽이 이양순 할매.
이양순 할매도, 박부임 바리스타도, 외지인이 들어 동네가 개판됐다 하면서도, 시끌벅적해진 동네 분위기를 원망하는 눈치는 아니다.
역시 왼쪽이 박부임, 오른쪽이 이양순 할매.
“옛날에는 동피랑 산다는 말도 안 했소. 달동네라꼬 놀림을 받았거든. 셋방도 안 나갔소. 누가 꾸역꾸역 이런데 올라와 살라카나!” 지지리 가난했던 ‘인생유전’의 뒤안길은 10년 사이 천지개벽을 겪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로가 된 옛 동피랑 골목길에 전국에서 온 ‘관광버스’가 서 있다.
2017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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