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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는 여행

10년전 마산어시장 진동 대풍골목

골목과 사람(3)마산 어시장 진동·대풍 골목

파도에 잔 부딪치며 회 한정소주 한잔

이일균 기자 iglee2@dominilbo.com 2006년 03월 18일 토요일
할머니는 계속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다. 웃으면 작은 눈매나 눈썹, 입술이 하나같이 동그랗게 된다. 그런데 칼을 잡으면 표정이 냉정하게 변한다. 소나무로 만든 50㎝ 두께 도마 위 시커먼 우륵 모가지에다 칼끝을 ‘꾸욱’ 누른다. 요즘 철이 좋다는 도다리나 숭어는 그렇게 목을 따도 펄떡거린다.그렇든 말든 할머니는 지느러미를 잘라내고, 뱃속의 내장을 꺼낸다.그 때 할머니의 눈두덩은 툭툭해지고,양쪽 볼은 볼록하면서 단단해진다.단호해 보이는 표정이다.

   
▲ 대풍골목에서 20년 넘게 횟집을 운영해온 김복권 할머니.
△진동골목, 대풍골목으로 상징되는 어시장의 골목


마산 어시장의 형성은 고려나 조선시대 조창 옆에 섰다는 마산 장시와 역사를 같이 한다.

‘생기기로는 족히 1000년을 넘고, 흥하기로는 조선말부터였다’고 마산시사 등이 전한다. 그렇게 포구가 어시장을 만들었다. 어시장 안에는 여러 골목이 생기고 없어지고 했다.

지금 남아있는 어시장 골목 중에서 오래 되기로는 진동골목이다. 남성동 지하도 옆에서 시작돼 대풍골목으로 이어진다. 1950년대와 60년대 진동면의 어민들이 이 골목 주변에 생선노점을 많이 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대풍골목이 생긴 건 한참 뒤. 그러나 바깥쪽 활어골목 횟집들이 큼직큼직한데 비해 진동·대풍 횟집들이 하나같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걸 보면 그 연륜을 짐작한다.

이어진 두 골목엔 스무개가 넘는 횟집과 생선가게, 건어물과 잡화점 등이 오렌지색 조명 아래 늘어섰다.

대풍골목에서 20년 넘게 횟집을 했다는 김복권(74) 할머니에게 다시 짓궂은 질문을 했다. “생선을 뭉텅뭉텅 썰어내는 칼질을 할 때 기분이 어떠시냐”고.

“기분 좋을 리가 있나. 더럽지. 생각 없이 목을 따긴 하지만 이게 참 더러운 일 아이가.”

   
▲ 1969년부터 어시장 횟집골목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는 조상점 할머니.
“홍콩이 따로 없었제”

잠시 말이 없던 할머니는 “칼 다루는 사람들만큼 칼을 조심하는 사람이 없을 끼요”하고 칼질하듯 말을 끊었다. 우문에 현답이다.

30년 전 어판장 중매인 일을 하다가 횟집을 차렸다는 김복권 할머니는 늘 웃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살기가 더 팍팍하다고 했다.

“살기가 어떠냐고? 더 안 좋지. 옛날에는 장사는 작고, 손님은 많았다 아이요. 그때 열 집이 있었다면 지금은 백 집이야. 더 어려워.”

대충 만족하며 살수도 있으련만 할머니마저 흐른 세월을 아쉬워 할 만큼 어시장의 횟집은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결정적 역할을 한 곳이 진동·대풍골목과 함께 옛 ‘홍콩빠’다. 홍콩빠는 60년대 진동골목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됐다. 현 농협 남성동지점 근처에 목조로 바다 위에 반쯤 걸쳐 있었다.

바다가 훤한 건물 안에서 회를 먹으면 건물 밖에는 바닷물이 차 올라 건물마저 울렁울렁 했다.

60년대부터 세월 타고 너울너울

쫄깃한 회에 쐬주가 한두 잔 들어가면 바다가 찰랑대는지, 횟집이 울렁거리는지 헷갈렸단다.

대우백화점 지상주차장 입구 바로 옆쪽 횟집에서 이어진 블록 내 스무집 가까이 되는 곳을 지금도 ‘구 홍콩빠’라 한다.

조상점(77) 할머니는 69년부터 지금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어시장 횟집골목과 함께 보냈다. 가게도 일찍 차려 원조 홍콩빠에서 3번 점포를, 70년대 이전했던 홍콩빠에서 15번을 운영했다.

그는 첫 홍콩빠의 위치를 현 농협 남성동지점 일대로 정확하게 기억했다.

“건물에 광목 다리를 세워서 지붕엔 양철을 얹고, 벽에다 밀가루 자리를 덮었다 아이가. 바다쪽을 훤히 틔워서 술 먹다가 파도가 가게 속으로 들어오고 그랬제. 손님들은 그걸 참 좋아 했습니더. 그래서 홍콩빠 아임니꺼.”

   
고기 놓고 싸움할만큼 흥하던 이곳


“어시장 노점도 바로 시작한 게 아임니더. 내 나이 서른하나에 남편이 죽고 나서 감 장사도 하고, 딴 것도 하고 그랬소. 그 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지금은 전화만 하먼 고기를 갖다 주지마는 그때는 고기 차지한다꼬 치고 박고 난리였제. 부끄러운 것도 없었다 마. 고기 대주는 남자들 가랑이 사이로 고개를 처넣고 뺏어오고 그랬다 아이가.”

그렇게 했으니 진동골목이나 홍콩빠가 70~80년대까지 마산 주당들의 1차 술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다고도 했다.

오늘날 어시장의 횟집촌은 한두 곳으로 집중돼 있지 않다. 어시장 활어골목이나 대풍골목, 해안도로 건너 바다 쪽의 장어거리까지 형태는 다양하고, 규모는 더욱 커졌다.

80년대까지 주당들의 술자리로 그만이던…

더운 여름날 밤에는 장어거리를 찾는다. ‘참깨가 서말’이라는 가을전어 철에는 대풍이나 활어골목이 성하다.

“마, 들어오소. 요새는 딱 도다리 새꼬시 철 아이가. 숭어도 좋고.” 연방 생선에 칼질을 하면서도 눈길은 손님한테서 떼어놓지 않는다.

“싱싱하다 캉께네. 아따 와 그냥 가노!”

고함소리 요란한 활어골목 안 횟집 하나 하나를 그냥 지나치는 데에는 제법 뱃심이 필요하다. 웬만해서는 골목 어귀에서 시작되는 아줌마들 고함에 대충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