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훌쩍 떠나는 여행

정약용의 집필 정신

다산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남양주 마재에서 태어나 1836년 같은 곳에서 죽었다.

40세였던 1801년 천주교 신자에 대한 탄압이었던 신유박해 사건으로 전남 강진에서 18년 간의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권의 책을 썼다.


우선 <목민심서>. 48책 16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1816년 봄 완성했다.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관한 저술을 인용해 목민관(수령)이 지켜야 할 것을 정리하고, 당시 관리들의 폭정을 고발했다. 그 내용이 집필 당시에 공개됐다면 온전치 못했을 것이라는 해설사의 설명이 따랐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다듬어 진 것이 개혁서인 <경세유표>. 44권 15책 분량으로 행정기구의 개혁을 비롯해 관직제도, 토지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했다. 경세유표가 위로부터 법과 제도를 개혁하여 민생 안정과 부국 강병을 추구하는 개혁서라면, 목민심서는 아래로부터 백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윤택하게 하려는 방편을 담은 개혁서로 평가된다.

무릇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과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필생의 집필은 후대 '실학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로 귀결됐다. 사상의 근저는 '개혁'으로 압축됐다.



김호석 화백이 지난 2009년에 만든 다산의 영정. 다산초당 벽면에 배치됐다. "어릴적 천연두로 눈썹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둥근 테의 안경을 썼다는 기록에 근거했다. 선생의 기록과 후손 300여명의 인상을 관찰해 그렸다"는 화백의 설명. 



그의 집필정신은 '100년 뒤를 기다리며'라는 다산기념관 한쪽 소개글에 압축됐다. 

'56세의 나이에 유배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관직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 자락을 자신의 저술을 정리하는데 보냈다. 저술만이 후대에 이름을 전할 수 있다고 여겼다. 훗날 누군가 자신의 글을 읽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한 글자, 한 구절까지 교정하고 또 교정했다. 친구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그를 찾는 이 없었지만 원망의 심경은 비치지 않는다. 18년 유배생활에 대한 한탄도 없었다. 말년의 편지에는 병석에 누운 장면이 많지만, 그런 심경이 드러나지 않는다. 특히 세상을 뜨기 6일 전 편지가 그렇다. 정약용은 그렇게 100년 뒤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기다림의 집필정신은 자신의 호 사암(俟菴)에서도 드러난다. 선생은 회갑년에 지은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호를 사암이라 했다. 기다린다는 뜻이다. '귀신한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백세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는다'라는 중용의 한 구절에서 취했다는 설명이 있다.  


선생의 집필정신을 상징하는 사례를 다산기념관 해설사가 소개했다. 1801년 이후 4년간 기거했던 주막 한켠. 나중에는 서당까지 열며 '사의재'로 불렸다. 순찰 나온 포졸들에게 "방안에서 뙤작뙤작 책이나 뛰적임스로 벙어리로 지내고 있구마는" 하면서 언제나 안심을 시켰다.더구나 유배생활을 시작한 이후 신유사옥 당시 자신의 조사를 맡았던 이가 직급을 두 등급 낮추어가면서까지 강진현감으로 부임하자 선생은 더더욱 꼼짝을 못하고 읽고 쓰는 일에 몰두했다 한다.


정약용 선생의 집필정신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청족(과거에 응시하고 벼슬을 할 수 있는 집안)으로 있을 때는 비록 글을 잘하지 못해도 혼인도 할 수 있고 군역도 면할 수 있지만 폐족(조상이 큰 죄를 지어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는 집안)으로서 글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글 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배우지 않고 예절을 모른다면 새나 짐승과 하등 다를 바 있겠느냐?'

'폐족 가운데서 왕왕 기재가 많은데,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과거 공부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에 응할 수 없게 됐다고 해서 스스로 꺼리지 말고 경전 읽는 일에 온 마음을 기율여 글 읽는 사람이 종자까지 따라서 끊기게 되는 일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



다산초당을 방문한 아이들에게 다산을 소개하는 강영석 해설사. 500m 옆 다산기념관에서 진행중인 '편지로 읽는 다산의 정신 전시전' 위원장 역을 맡고 있다.



또하나, 그의 집필 내용을 풍성하게 했던 것이 제자를 가르치고 학우들과 교류했던 일이다.

가르치는 일은 주막 한켠 빌려 썼던 사의재에서 시작됐다. 주로 아전의 자식들에게 수준에 맞춰 <천자문>을 재편집해 만든 <아학편>을 가르쳤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그가 경계했던 것이 셋이다. 하나는 민첩하게 외우는 것. 머리만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된다 했다. 둘은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 자기 재주에 못이겨 들떠 날뛰게 된다 했다. 셋은 깨달음이 재빠른 것.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않으니 공부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과한 아이가 선생의 수제자로 뒤에 문장가요 시인이 됐던 아명 산석, 황상이었다.

그가 강진에서 교류했던 대표적 학우는 1805년 지금의 다산초당 위 백련사 주지로 왔던 혜장 스님. 책에는 이들이 <주역>에 대한 문답으로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다 한다.

사의재에서부터 가르치고 뒤에 다산초당에서 선생의 집필을 별도로 정리하며 도왔던 이학래. 

그리고 혜장을 통해 제자 되기를 자청했던 초의 스님. 나중에 차에 관한 이론과 실증을 정리해 '다성'으로 평가되면서 대선사로 불렸다. 그는 다산을 통해 불교와 유교의 상통을 배웠다 한다.


다산이 초의에게 준 글에서 선생의 집필정신은 다시 읽힌다.

'만년에 찬 바위 아래/ 초가집을 얻어 죽이나 먹으며/ 승려로 문 닫아 걸고 저술에 힘쓴다면/ 반드시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이같이 한다면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초의는 또 이렇게 읊었다.

'물병 하나만 있다면/ 어딘들 샘이 없겠느냐/ 지팡이 하나만 있다면/ 어디 간들 길이 없겠느냐/ 사방을 구름처럼 노니면서/ 나라 안의 이름난 산을/ 두루 다 보고/ 나라 안의 이름난/ 선비를 다 알아/ 맵고 쓴 맛을 보면서/ 바람에 빗질하고/ 비로 머리를 감는다'

그리고 다산이 직접 불러 가르쳤던 아들 학연과 학유. 이들의 교류는 아들대까지 이어졌다.



다산기념관에 소장된 매조도. 딸과 사위의 해로를 바라며 1813년 다산초당 내 집필실 역할을 한 동암에서 그렸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펼쳐진 '다산'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호를 다산으로 삼았던 정약용 선생.(이에 대해 <다산의 여자>를 쓴 박주병은 생전 정약용이 다산이라는 호를 쓴 적이 없다고 반박한다. 사암(俟菴)이라 했다는 것이다.) 초당을 오르는 길에 정호승 시인이 쓴 '뿌리의 길'이라는 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