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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4대 100년 아흔아홉의 할매

4100년 아흔아홉의 할매

 

227일 오전 10시 창원시 마산회원구 요양병원 6층의 한 병실. 문을 열자 왼쪽 세 침상 중 맨 안쪽에 나의 외할매 신 씨가 누워있다. 눈을 감은 채. 얼굴만 드러낸 채 온 몸을 분홍색 이불로 덮었다. 병실 왼쪽 할머니 셋은 모두 그렇게 누워 있고, 오른쪽 할머니 둘은 앉은 채 빠꼼히 나를 바라본다. 오늘은 월요일인데도 주말 간병인이 자기 일에 열중해 있다. 이 방은 TV 볼륨도 낮고, 보는 이도 없다.

나는 평소 하던 대로 할매 하고 살짝 부르면서 방금 들어오기 전에 씻은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고는 신 씨 머리카락에 갖다 댔다. 그렇게 하면 금방 눈을 뜬다. 그냥 기력이 없어 눈만 감고 있을 뿐 잠들지 않았다. 왔나? 그래 집은 별고 없고? 이름은 바로 기억하지 못해도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차린다. 손이 찹네 밖에 춥나? 예 아직 겨울 아임미꺼 마이 춥습니더. 추운데 만다 오노 집에 있지. 그리고는 눈을 다시 감는다.

입원 5년째, 한 달에 한두 번 오는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으레 그러듯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과 동영상을 찾는다. 그저께 아버지와 엄마, 작은 아들과 함께 갔던 순천만 사진을 찾아 할매 눈앞에 가까이 댔다. 할매 함 보이소. 할매는 신기한 듯 시선을 모은다. 왼손 검지까지 갖다 댔다. 그리고는 신기한 듯 말을 이어갔다. 이기 누고? 딸(엄마) 아이가. 도 알겠고. 할매가 둘째를 가리켰다. 둘째는 할매 병실에 자주 왔다.

그리고 한 2주일 전에 찍었던 큰아들 졸업사진. 역시 나와 둘째, 엄마 얼굴은 알아봤다. 하지만 훌쩍 커버린 첫째와 아내, 그 옆의 아버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다음은 언제나 보여드리는 친손녀와 증손자 사진이다. 증손자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할매 반응이 가장 확실한 사진이다. 꼬박꼬박 인사하는 동영상에 이놈 이놈 하면서 왼손 검지를 이리 저리 갖다 댄다.

사진놀이가 끝나면 다시 정적이다. 그때 할매가 구시렁거렸다. 내 고향 바래기, 큰집이 비(비어) 있다. 자꾸 눈에 빈다(보인다). 내 동생 덕재 길재 봉재는 오데 갔시꼬? 경재는 큰집 동생이고 영재 홍재 학재는 다 사촌 동생 아이가. 전부 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바래기 우리 집 옆에 논도 있고 밭도 있다. 제뜰 낭뜰에 논이 있고 해치밭골에도 있고 소밭골에서 소 믹이고(먹이고). 집에서 20리 가면 안의장이고 거창장에도 안 갔나.

1919년 음력 1113일 출생한 신 씨. 아흔아홉의 병상에서 할매는 그렇게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런데 집이 왜 비었나? 함께 뛰어놀던 동생들은 왜 보이질 않나? 할매는 90년이 지난 지금의 고향집으로 찾아간 걸까?

2017.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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