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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의 가치

아래 글은 <경남도민일보> 기자로 일하는 제가 오늘 칼럼으로 실은 내용입니다. 

제가 하는 아파트 입주자대표나 동네 주민자치회 활동에 관한 글입니다. 

당당하지도, 씩씩하지도 않은 푸념같은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 11월 6일자 '지역에서 본 세상' 칼럼

'자치'의 가치
지금이야 "자치" "자치" 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나는 이 말을 별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지방자치' 기사를 쓰야 되겠다 싶었던 건 2016년 홍준표 경남지사 때부터다. 그때 경남도청을 취재하던 나는 민생·노동 등 서민정책을 철저히 외면하던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 쓰기가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매일 쓰는 기사의 7할이 부정적 기사였다.
불평과 불만이 입이 아닌 기사에 달라붙을 그즈음 이래선 "문장 버리겠다" 싶었던 나는 길을 하나 찾았다. 그때 아마 홍 지사가 '경상남도지방분권협의회'를 구성했을 것이다. "이야, 이런 것도 하네"라며 흥미를 느꼈던 나는 생산적 취재거리를 찾았다는 심정으로 긍정적 기사를 썼다. 그 뒤에 홍 지사는 기자들과 점심 먹는 자리에서 지방자치에 대해 이것 저것 묻는 나에게 "나는 강력한 중앙집권론자다. 지금 전 세계는 트럼프, 푸틴, 시진핑, 아베처럼 스트롱맨의 시대다"라며 찬물을 끼얹었다.  
어쨌든 그 이후 나는 '자치분권의 시각으로 본 홍준표 도정' 등 지방자치 기사를 많이 썼다. 그러나 예산과 사무, 인사·조직권 측면에서 한계가 뚜렷했던 지방자치는 홍 지사 때나 민주당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큰 진척이 없었다. 몇 년 간 기사를 쓰도 이야기가 맴돌았다. 그때부터 주민자치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희망 고문을 하느니 차라리 멀리 바라보고 자치 주체를 세우는 일이 먼저겠다 싶었다.
2020년 충남 홍성군에서의 경험이 그런 의지에 밑거름이 됐다. 홍성군 홍동면 주민자치회 활동가가 그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중앙정치로 불평 불만을 늘어놓을 시간이 없어요. 동네 일만 해도 머리가 아파요. 홍동면에는 길고양이보호모임이 있는데, 동네 어르신들은 진짜 싫어해요. 심지어 청소년들 모이는 만화방에 콘돔자판기 판매 제안까지 나왔어요. 어른들은 난리였지만 결국 설치를 했죠. 우린 동네가 시끄러워요. 그렇게 부딪히고 갈등을 빚으면서도 조정이 돼 가요."
획일적 정치와 독점, 양극단의 진영논리, 철벽같은 양당체제의 한계를 뛰어넘는 다양성의 세계였다. 홍동면 내의 주민자치회 등 50개가 넘는 단체·동호회는 다원성의 텃밭이었다. 소수자가 존중받는 차원을 넘어 결정의 주체였다. 전국에서 숱한 주민단체나 공동체 단체들이 활동을 하고 있지만, 현실적 권력이 없는 '부스러기'상태에 불과하다고 내 생각이 달라졌다.  
그 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입주자대표로, 동네의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만 4년 넘었다. 실제로 활동을 하면서 2020년 홍성에서 품었던 '희망'은 점점 약해졌다. 회의에 참여하면 '갑갑'했고, 어떨 땐 한심하기까지 했다. 단체나 회사에서 나름 '집중력' 있게 안건을 다뤘던 나로서는 입주자대표회의나 주민자치회 회의가 느슨하게 느껴졌다. 생업도 아니고, 강한 구속력을 지닌 회의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편하게, 재미있게 의견을 나누는데 만족했다. 
어떨 땐 회의 사전 준비까지 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분위기나 사람 탓이 아니라, 지금 내가 골몰하고 있는 이 일이 도대체 어떤 성과를 가져올까 막연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돈" "돈" "돈" 하는데, 돈은 커녕 무슨 '득'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럴 땐 어떻게 하는데?" 누가 이렇게 반문한다해도 별로 자신있게 할 말이 없다. 그냥 "자치의 본질은 현실이다.", "거품없는 내 실체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몰골을 드러내는 일이다." 정도로 답을 할 수 있을까.  

 

멋있게 끝내고 싶었습니다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찝찝합니다. 

하지만, 며칠을 머리를 감싸 고민해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심정을 옮기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의견을, 더욱 건강하고 견고한 논리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2024년 1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