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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는 여행

10년전 그 골목-통영 도천동 2006년

골목과 사람(32)통영 도천동 윤이상 생가 주변

‘음악의 거장’ 소리 본능을 일깨웠던 길...옛 굿 장단·바다의 소리

이일균 기자 iglee@idomin.com 2006년 10월 30일 월요일

 

윤이상 선생은 1995년 타계할 때까지 고향의 소리를 그렇게 그리워했다. 이런 말까지 했다. “엄마 뱃속에서는 엄마 얼굴을 몰라요. 마찬가지로 고향에 있을 때는 고향을 모르죠. 이역만리 떨어져 있으니 이제 고향의 얼굴을 알게 된 거죠” 그가 태어난 통영시 도천동의 바다와 갯가 노동요 속에 윤이상 음악의 원형이 있다. 어릴 때 뛰어놀았던 도천동 골목 안에 별신굿이나 오광대 가락으로 유명한 통영의 민간음악이 흘렀다. 1935년 일본에 가기 전까지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던 그에게 소리 본능을 심었다.

 

 

   
 
▲ 번지수를 모두 적어 놓은 쪽 골목.
 

 

도천동 생가주변의 골목에는 노동요의 가락 같은 사람들 삶이 있다. “이놈 저놈, 벨 놈이 다 들어왔지” 시집와 64년을 이 동네에서 산 할머니의 표현이다. 지금도 갯가 사람들이, 항구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윤이상이 열한살 때까지 살았던 생가와 이후 부산사범학교 교사로 전근할 때까지 살았다는 초가까지 50m 가량 좁은 골목을 걸으면 마치 그의 얼굴이 따라오는 듯 하다. 생가에서 한때 그가 교편을 잡았던 통영여고로 가는 골목에는 담장에 걸려있는 이불이 고향집처럼 푸근하다. 또 그가 가장 많이 걸어 다녔을 법한 통영보통학교 가는 골목엔 낮술에 취한 아저씨와 수다에 빠진 아주머니들이 곳곳에서 햇볕을 피한다.

△갯가엔 노동요, 골목에는 굿 장단

도천동 157번지 윤이상의 생가는 지금 점집이다. 본래 생가 표지석이 담장 쪽에 있다가 정기를 뺏는다는 이유로 점집 주인이 원해 맞은편으로 옮겼다. 점집을 바라보면서 통영 토박이 최정규(55)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통영 민간음악의 근원이 굿이었어요. 옛날엔 잔치하는 것도 굿판 벌인다고 했어요. 물론 선생이 태어났을 때는 점집이 아니었지만 유년 때 소리의 기억 속에 굿 장단이 깊게 뿌리내리지 않았을까요?”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단지에다 항구시설이 들어선 생가의 남쪽은 선생이 유년 때에 바다였다. 생전 윤이상의 회고 속에서는 바다의 소리가 늘 등장했다 한다. 한학자에 소목(가정용 가구) 일을 했던 아버지와 배에 타 낚시를 했던 기억, 갯가에서 조개를 채취하던 아낙들의 노동요 가락이 그 내용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이런 말을 했을까. “어릴 때 누나가 밥을 앉혀놓고는 갯가에 가 조개니 파래니 하는 것들을 가져와 바로 반찬을 만들었지” 그만큼 도천동은 바다에서 가까웠다. 한때 대형 그물공장이 차지했던 생가 앞은 지금 윤이상을 기리는 테마공원으로 계획됐다. 때문에 공장 옆 골목은 흔적만 남은 채 허연 땅바닥을 드러내놓았다.

지금 비록 자리를 옮겼지만 선생의 생가에서 통영여고 쪽으로 올라가는 골목은 그 형태와 좁기가 전형적인 ‘미로골목’이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 돌아 나올 수 없는 곳. 그러나 지금은 여고 쪽으로 산복도로가 나 100m도 못 가 골목은 끝이 난다. 볕 보러 나온 이불이 담장위로 기어 올라갔다. 선생은 아마 이 골목을 통해 자신이 해방 직후 근무한 현 통영문화원 쪽 통영여중 자리로 출퇴근을 했을 것이다.

△세병관 쪽 통영보통학교 갔던 골목

생가에서 선생이 다녔던 세병관 쪽 옛 통영보통학교 가는 골목을 따라가면 골목의 진면목을 하나 확인할 수 있다. 역시 산복도로 쪽으로 좁은 골목이 하나 있는데, 그 어귀에 ‘201’ ‘202’ ‘203’ 식으로 그 길 안에 있는 집들 번지수를 죄다 써놓은 것이다. 최정규 시인은 이를 일러 ‘한편의 시’라고 표현했다.

샛골목 옆에서 자천타천으로 이 동네 ‘박사’인 서달순(84) 할머니를 만났다. 이 동네 골목에 통일교 훈독교회가 들어온 연유도, 골목 가운데 옛날에 있었던 샘 이름이 ‘아랫물 샘’인 것도 죄다 알았다. 다만 윤이상의 어릴 적 이야기를 모른다 뿐이었다. 90년대 전만 해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됐던 좌익인사 윤이상의 이름이 금기시됐기 때문이다.

다변의 할머니는 자신이 이 동네에 시집온 1940년대부터 요즘 “이 사람 저 사람, 벨 얄궂은 사람이 다 들어온다”는 이야기까지 중구난방 이어갔다. “(돌아가신)우리 집 양반이 못 하나 치지 않는 선비가 돼서 내가 이 모냥으로 안 늙었소. 이름 지로 오고, 날 받으로 오고 했는데 그기 돈이 되나. 콩지름에 온갖 풋나물까지 내가 머리 우에 안 지본 기 없다 아이가.” 할머니는 윤이상 이야기가 나오면 조금 하다가 샛길로 빠지고, 민간음악 화제가 나오면 금방 옛날 고생했던 말씀 하시고 그랬다. “이 동네에서는 사람한테 인심 잃으면 못 살아!” 지금도 그렇단다. 할머니 머릿 속에는 윤이상 보다 동네소식이 그득하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이 바로 ‘윤이상 거리’다. 생가를 기준으로 오른쪽 해저터널 입구에서 왼쪽 해방교까지, 이 거리에는 국제음악제 사무국이 있는 페스티벌하우스 등의 관련 시설이 있다.

앞으로 생가 앞 광장에는 도천테마파크가 설치된다. 이 골목을 찾은지 며칠 지나지 않아 10월27일부터 6일간의 일정으로 국제음악제 가을시즌이 진행되는 점은 흥미로웠다.

윤이상을 배출한 통영의 음악은 별신굿과 오광대 같은 민간음악에 원형을 두고, 인근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인 통제영 취고숙청(군악 담당)에 압축됐던 정악과 1800년대 말 호주선교사 등으로부터 전래됐던 서양음악 등을 아울렀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은 어렵다. 서양의 클래식 음악 전문가조차 어려워한다. 고전음악과는 구별되는 현대음악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통영 사람들은 이론의 소유 여부를 떠나 윤이상 음악 속의 가락이나 효과음을 이해한다고 한다.

그의 음악이 생경한 클래식 이론에서 출발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사람은 윤이상의 음악을 쉽게 듣는 요령까지 전했다. 연주 중에 플루트 같은 관악기 소리가 나오면 이를 대금소리로 연상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