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에 올리는 글에 대해 문득 궁금해 하는 분이 있었다. 후배였다.
"왜 매번 득구 진구 이야기냐"고 했다.
내겐 그 말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냐"로 들렸다.
덧붙인 질문도 있었다.
"내 기억엔 애들 이름이 득구 진구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너무나 반가운 관심에 막혀있던 물길이 틔인 것처럼 나는 말했다.
"물론 득구 진구는 내 아들이야. 가명이지만. 쓰다보면 때론 각색할 수도 있으니까. 난 평소 갖고 있던 아파트라는 주거의 한계를 내 아들들이 커가는 모습에 비쳐보고 싶었어."
내가 아파트를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한 건 7~8년 전 만취해 길을 잃어버렸을 때부터였다.
어느 술취한 겨울밤, 난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 안에서 내가 사는 아파트 동을 잃어버렸다.
만취했었지만 난 그때 그 잔영이 지금도 남아있다. 사방 어느 쪽도 뚫려있지 않은 거대한 벽. 갈 길은 물론, 방위감각조차 그때 내겐 사라졌다. 그때 난, 아파트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쓰기로 했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맑은 정신으로 심야에 접어들 무렵의 시각에, 아파트의 단지와 단지 사이 빈 공간에 앉았다. 마치 고층의 공기가 휘감기는 듯한 느낌, 수백 수천의 가구마다 흘러나와 졸졸졸 무리를 짓던 소리를 접했다.
그리고는 나는 그 밖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밖에 있으려고 했다.
그 버릇은 나에게 문제의 근원 중 하나를 아파트로 여기게 했다. 특히 풍부한 정서와 개성의 형성에 걸림돌로 여겨졌다. 이미 형성된 정서와 개성을 막아버리는 존재임은 물론.
법정스님의 산문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구절만큼 당시 기분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어느 수학자에게 주변 동료들이 흔히 물었다. 자네는 평생 수학만 연구하는 그 일이 지겹지도 않나. 그 일이 이 사회에 특별한 공헌을 한다고 생각하나. 수학자는 이렇게 답했다.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그만이지. 꽃이 피어서 봄의 들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바가 아니라네.'
부연에 해당하는 구절도 있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빛깔을 빼앗고 얼을 앗아 간다. 사고의 힘과 가치에 대한 판단력을 흐려놓는다. 맹목적이고 범속한 추종은 있어도 자기 신념을 갖는 것은 어렵게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서로 닮아 간다. 주택단지의 집들처럼 그놈이 그놈같다. 동작뿐 아니라 사고까지도 개성 없이 모두 닮아 간다. 이쯤 되면 고유명사는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일련번호나 보통명사로써 우리들의 호칭을 대신해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아파트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던 그 무렵의 일이었다.
마산의 구암동 대동아파트 22층으로 이사가던 날, 나는 이미 배치된 거실의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베란다쪽 전경을 접하기에는 반대의 구도가 그럴싸 했다. 이사짐센터 아저씨도 들리게 아내에게 말했다.
"어때, 방향을 반대로 하는게 훨씬 낮지 않을까?"
아내는 단호했다.
"어떻게? TV나 오디로를 놓을 선반도 다 이쪽으로 설치돼 있는데. 콘센트도 마찬가지고."
곁의 아저씨도 바로 거들었다.
"짐 옮기랴, 전기선 이어랴 많이 번거롭죠!"
그리고 이어진 말이 걸작이었다.
"1층부터 21층까지 다 이쪽으로 보고 있는데, 22층만 반대로 보고 있는 것도 우습죠"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려다가 힘이 빠졌다.
그리곤 체념했다.
아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