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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아빠가 자꾸 삐져!

득구야,

 

이거 뭐 아빠가 더 날카롭고 딱딱해지니까 할 말이 없다.

 

요즘은 너를 대할 때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말투도 사납고 그러네.

 

이유가 없진 않아.

 

어젯밤엔 밤 11시가 돼서야 갑자기 니가 버스도 끊긴 친구 집에서 외박 신청을 했잖아. 그리고 오

 

늘은 아빠가 일하고 4시쯤 들어왔을 때까지 컴퓨터만 하고 있더라.

 

인정하지? 그 뿐만이야?

 

4시 반 쯤 어항 물을 갈자고 했더니 10분 있다가 하자고 해서 기다렸더니 5시 반이나 돼서야 움직

 

였고, 결국 6시 반 수학과외 시간에는 10분 가까이 늦었다. 그게 돈으로 따지면 얼만데?

 

아빠가 쫀쫀하제?

 

 

득구가 고등학교 입학하고 처음 어항 물을 갈았다. 득구가 당번이니까.

 

하여튼 니 상태, 니 기분 그런 것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니 모습에 연연하게 되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우린 종종 기분 좋을 때보다 나쁠 때가 많고, 웃고 즐길 때보다 인상 쓰고 짜증 낼 때가 많잖아.

 

오늘 아침에도 아빤 일요일 출근길답게 조금 무거운 기분으로 시작했다. 며칠 전의 과음, 어젯밤

 

되풀이된 음주에 속도 부담스러웠지.

 

그런데 차를 몰고 도청 가는 길 정말 상쾌한 날씨를 접하고 도청공원도 걸어서 한 바퀴 돌고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술 마시는 것도 즐거움이고, 적당하게 하면 흥겨운 일이라는 여유도 생겼

 

.

 

이왕 한 바퀴 도는 것, 스트레칭까지 했어. 스트레칭 하니까 기체조할 생각이 들었고. 시간도 9

 

라 여유도 있고 해서, 정확히 30분간 호흡수련을 했지.

 

눈을 감으니까 청명한 날씨에 감춰졌던 햇살이 느껴지더라. 깊게 호흡을 하니 살랑살랑한 바람이

 

들어오더라. 한 동작 한 동작 집중을 하니 그 전까지는 들리지 않던 새소리가 들리더라. 나중에는

 

도청연못에서 처음 물소리까지 들었다.

 

 

일요일 오전 9시의 도청연못이야.

 

 

그리고 떠올린 게 엉뚱하게도 감사란 말이야.

 

햇살이 감사했다. 바람이 감사했다. 새소리가 감사했다. 공원이 감사했다. 도청이 감사했고, 일이

 

감사했고, 나중에는 나에게까지 감사하더라.

 

집중력을 잃은 한 순간 새소리 물소리가 끊기고, 다시 화나는 일이 떠올랐지만 다시 집중을 하니

 

나아지더라.

 

그저께 한 순간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 한두 달쯤 수련을 쉬고 그 시간에 기타를 배우는 게 어떨

 

. 그러면 더 재미있어질 것 같고, 기타실력이 부쩍 늘 것 같았거든.

 

그런데 말이야.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이 잘 되는 이 시간에 생각하면 내가 기타에 미칠 것 같지도

 

않고, 그렇게 재미있을 것 같지도 않거든.

 

그래. 적당히 술을 즐기듯, 기타도 생각날 때 즐기는 거야. 지금 변진섭의 숙녀에게를 치고 싶고,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치고 싶듯이.

 

즐길 건 즐기는 거고 일상은 일상이다,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일과 가족, 건강은 내 일상이고,

 

술 음악 또 다른 재밋거리들은 어차피 여흥이다 이거지.

 

득구야.

 

오늘 아빠 선배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썼어. 아마추어지만 연극배우지.

 

 

마산 극단 상상창꼬의 다크엔젤의 도시 포스터

 

신나는 하루였다. , 밤 공연 모두 3.15아트센터 500객석을 가득 채웠다. 김소정 연출 실력에 덕

 

이 있어서 가능했다. 신체즉 장르를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경남에서 신체극을

 

하는 극단은 상상창꼬뿐이다. 끝이 시작이라 했던가. 한 단계 도약한 시작이 될 것이다. 이제 한

 

동안 집에 일찍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잠도 푹 잘 것이다. 작은 행복이 주위에 가득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

 

어때?

 

뭔가에 감사할 줄 안다는 게 느껴지지?

 

감사하는 사람에게 따라오는 게 행복이잖아. 이런 마음을 가지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런 기분이라

 

도 너랑 느껴보고 싶다.

 

2017년 5월 14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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