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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내가 살았던 집에 대한 기억

몇살 때인지는 모르겠다.
계속 들으면서 어느새 상상이 심어진 모습일 수도 있다.
마산 상남동의 어느 집,
근처에 과자공장이 있었고, 적당한 크기의 나무가 동네앞에 있었고,
그앞에 도랑이 있었다.
그리고 여섯살땐가 일곱살 땐가 자산동 언덕배기의 집으로 이사갔다.

거긴 기억이 제법 있다.
언덕 쪽으로 창이 뚫린 작은 방과 작은 마루를 통해 이어진 큰방.
그 어느 지점에선가 냄비속의 끓는 물이 뒤집어지면서 동생 명균이가 발등에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범인가 하는 동네 형들,
이따금 언덕 아랫길로 산너머 화장터로 향하는 시신이 지게에 실려 갔었다.
어떤 누나의 종아리를 만져서 맞았던 빨래터도 기억이 난다.
그때 난 스타킹이 신기했던 것 같다.

그당시에는 국민학교였다.
마산 산호동의 합포국민학교 입학 하기 전에 학교 앞 골목 안집으로 이사갔다.
진훈이 형, 동생 태옥이, 명균이 들이 막 어울려 놀았고,
1학년 무렵 학교의 교실복도를 그들과 뛰어다니다가 담임선생인 문정희 선생님한테 꾸중(?) 이라기 보다는 부드러운 훈계 같은 걸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같은 골목 끝에 탁미경이 집도 있었고, 조금 돌아가면 김엘리 집도 있었다.
엘리는 그 친구 방까지 따라들어가 공부하고 밥먹고 하면서,
내 기억에는 뽀뽀까지 했던 첫사랑이었다.
엘리를 생각하면서 소위 '꾸무댁'이라고 가족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일종의 자위행위까지 하게 됐었으니.

몇학년 땐지는 모르겠고,
산호동 자유무역지역(당시 수출자유지역) 정문 옆의 바닷가 동네로 이사갔다.
입구가 쓸데없이 컸던 그 집에서 엄마는 한동안 과자가게를 했다.
TV가 그때 집에 들어왔고, 라면맛을 알았고, 엄마와 아버지가 자주 싸웠던 것 같다. 
난 그때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고, 한편으론 엄마와 싸우는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중연이 누나, 해운이 형이 그 집에서 같이 살았나?
그리고는 근처 태용이집으로 잠깐 이사를 갔다.
아마, 본래 살던 집 앞에 우리 집을 짓는 기간동안이었을 거다.
태용이 아빠가 시공자였고, 그 집에서는 방이 하나였고, 온 가족이 함께 잤던 일이 나는(?) 너무 좋았다.
그때 외할아버지가 집에 왔던 기억이 있다.
일본에서는 정말 귀하다는 김을 엄마가 엄청 많이 밥상에 올렸었다.

새집, 아버지에겐 역사적인 '나의 집'으로 이사했다.
똑같이 생긴 세 채의 집중에서 가운데 집, 
그런데 이 집의 안 구조에 대해서는 그리 기억이 없다.
큰방도, 작은방도, 부엌도, 대부분 집에 있었던 다락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세들어 살던 같은 학년의 주근깨 여학생이 기억날 뿐이다.
그리고는 무슨 일인지 그 동네를 떴다.
용마산 너머 산호1동으로 훌쩍 이사를 간 것이다.
옆집에 비슷한 나이의 여학생 '지추선'이 살았던 집,
작은 방에서 명균이와 글러브끼고 복싱했던 일, 중학교 추첨에서 창원중학교에 배정돼 울었던 다락방도 생각난다.

순서가 바꼈나?
아버지가 두번째로 지었던 집, 양덕동 수출후문 앞 동네로 이사갔다.
같은 창원중학교에 다녔던 이영민이 한 동네였고, 이웃 봉안동에는 친구 안병철이 살았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가서 마산역 밑에 있던 동양체육관에서 태권도를 배웠었는데...
뒤에 산호1동 화랑체육관으로 옮겼는데, 그게 앞에 말했던 집 근처여서 순서가 헷갈린다.
2층집에, 제법 방이 많았고, 녹음기로 옛날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해서 깨알같이 제목을 기록했던 아버지가 특히 기억난다.
중학교 2학년땐가, 집앞 길로 지나가기로 돼 있던 대통령차에 전해준다고 글을 쓰서 준비했던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쓰주셨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 내용은 "우리 아버지, 개인택시라도 한 대 받게 해 주십시오." 였다.

어떻게 된 건지,
중학교 어느 무렵에 본래의 산호동 바닷가 동네로 또 옮겼다.
뒤에 엄마가 '수구집' '수구집' 하던 2층집이었다.
그집에 정재호 선생이 가정방문을 왔으니까 3학년 때일수도 있다.
헷갈리는 건 중학교 때 친구 이병순이 용마산 도서관에 가자고 찾아왔던 일이 있는데, 그게 1학년 때인것 같다는 점이다.
병순이와 3학년 때도 같은 반을 했나?
여기서 난 급격하게 눈이 나빠졌다.
공부재미가 붙어서 밤이면 책상에서 공부를 제법 했는데, 불이 너무 어두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지금 내게 가장 많은 기억을 준 그집, 수구집 앞집으로 이사를 했다.
아마 짧게 살았던 것 같다.
방이 두개였고, 우리 3남매 방은 화장실 옆이라 계속 뭔가 방향제 같은 걸 뿌렸던 것 같다.
그 자극적 향이 아직도 뇌리에 있다.
거기서부터 난 안으로 안으로 자꾸 파고들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시작되고, 방에서 놀았던 일이 점점 많아졌다.
레이프개럿의 I was made for dancing에 반해 팝송에 눈을 떴고, 이 노래가 든 테이프를 샀더니 데비분의 You light up my life가 들어있었다. 서부음악 테이프도 샀는데 좋은 것 나쁜 것 추한 것이 좋았고, 한때 아버지가 하던 것처럼 녹음기로 팝송프로를 들으면서 노래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엄마는 돈 돈 하느냐"고 반발을 하면서 "쟈가 미쳤나?"하는 소리도 이 집에서 들었다.

사춘기가 본격화되고, 이제는 목소리까지 굵게 내기 시작하던 시기에 같은 동네의 옛날 학꾸 짜던 공장터의 2층집으로 이사를 했다. 
마산고에 입학했고, 입학전 3개월여를 완전히 방에서 혼자 있었다.
여전히 라디오를 듣고, 녹음을 하고, 2층에 살던 야시시한 누나 둘을 생각하면서...
옛날 학꾸공장은 롤러스케이트장으로 변했고, 난 옆집 방에서 신나는 음악소리만 듣고 남학생 여학생이 어울려 스케이트 타는 모습만 상상하면서 지냈다.
그래도 싸움을 잘 해야 한다 싶어서 신마산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던 곳이다.
나의 사춘기는 다시 그 동네를 벗어나 마산상고 밑 홍창목욕탕 앞집으로 이사를 갔던 그 집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아마, 고 1~2였을 때인것 같다.
정말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아버지와 엄마가 뭐라고 하면 툭툭 쏴버리는 식의 반항기를 보였고, 그때 가장 많이 아팠던 여동생 영이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부모님은 어떻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난 전기 고타마 싯타르타를 읽고, 김영삼의 지도자의 길을 읽었다.
그리고는 고 2가 됐고, 공부나 정서나 엄청나게 간격이 생겨버린 친구들을 보면서 '아,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절감하기 시작했다.
그무렵, 가장 먼 이사거리인 합성동 2층집으로 이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