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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는 여행

10년전 그 골목에 갔다 - 통영 도천동 2017년

윤이상이 태어난 통영시 도천동 골목을 10년 전 찾았을 때 나는 윤이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95년 타계할 때까지 그는 고향의 소리를 그리워했다. ‘엄마 뱃속에서는 엄마 얼굴을 몰라요. 고향에 있을 때는 고향을 모르죠. 이역만리 떨어져 있으니 고향의 얼굴을 알게 된 거죠.’ 그가 태어난 도천동 갯가 노동요 속에 윤이상 음악의 원형이 있다. 남해안별신굿, 통영오광대 가락이 그것이다. 1935년 일본에 가기 전까지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할 수 없었던 그에게 소리 본능을 심었다.”

 

 

 

 

 

 

그래, 그냥 거저 쓰이는 글은 없다. 10년 전에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윤이상을 연구했을 것이다.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단편적 내용이었겠지만. 그렇지만, 연구를 했던 것이다.

통영 토박이 최정규(당시 55) 시인이 말했다. “통영 민간음악의 근원이 굿이었다. 선생의 유년 때 기억 속에 굿 장단이 깊게 뿌리내리지 않았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남해안별신굿도, 통영오광대도, 도천동 갯가 노동요도 접한 적이 없다. 윤이상이 감옥에서 만든 <나비의 미망인>, 이후 <광주여 영원히><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달라진 건 하나, 이제는 듣고 싶어 졌다는 것이다.

지난 14일 그렇게 통영 도천동 골목 산책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윤이상 여행이었다. 10년 만에 찾은 도천동 골목은 윤이상 생가가 사라지고 기념관이 들어섰다.

 

 

 

10년전 생가가 있던 골목은 사라지고 기념관이 들어섰다.

 

 

기념관 광장에는 아이들이 정신없이 뛰어논다. '머시마' '가시나' 할 것 없이 "까르르르" 뛰어놀던 아이들이 10분이 지났을까, 한순간 어느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따라갔더니 합창 연습실이다.

통영시립소녀소녀합창단원인 아이들은 뛰어놀다 발그레 상기된 얼굴 그대로 곧 있을 통영음악제 공연 준비를 시작했다. 동작 연습을 위해 일어난 아이들 틈 사이로 악보가 보였다. '심청가 중 ○○○', '아름다운 나라'. 윤이상이 음악에 젖어들었던 초등학교 3학년 때처럼 지금 아이들이 윤이상에 스며들었다. 통영 아이들의 혜택이 아닐까?

 

 

윤이상기념관 광장에서 노는 아이들

 

 

전기 <윤이상>의 저자 박선욱은 통영공립보통학교 때 윤이상이 젖어들었던 음악에 대해 이렇게 썼다.

통영에는 굿이 많았다. 죽은 넋을 위로하는 진혼굿. 죽은 혼을 불러내거나 귀신을 쫓는 의식이 펼쳐졌다. 유랑극단은 시골 장터에 천막을 치고 무대를 만들었다. 각설이패나 어릿광대가 북, 장구를 치며 공연을 알렸다. 언젠가 판소리 명창 이화중선이 왔을 때는 고수 뒤로 태평소, 아쟁, 장구, 대금 악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보통학교 3학년이 된 뒤 새로 부임해온 음악선생님 때문에 윤이상은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이 무렵엔 집 근처 예배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풍금을 만지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즐거웠다.”

그의 초등학교 등굣길을 따라 새미골 골목을 따라 걸었다. 생가 터의 골목은 사라졌지만, 산복도로에 이르는 미로같은 골목은 살아 있다. 이불이 널려져 있던 예전 모습은 아니지만.

 

 

 

새미골 골목 음악벤치

 

 

 

새미골 골목

 

 

숨을 헐떡거리며 오른 산복도로 안내판에는 충렬사 1, 세병관 2라고 돼 있다. 소년 윤이상은 그것보다 더 멀었을 언덕길을, 고갯길을 걸었겠지.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렬사에도, 역시 이순신의 전승을 기념해 만들어진 조선시대 해군본부 격의 세병관에도 아이들이 많았다. 윤이상기념관 광장처럼. 저 아이들이 장차 윤이상이 되고, 이순신이 될 것이다.

 

 

충렬사

 

 

 

세병관 앞에서 펼쳐진 국가무형문화재 21호 승전무

 

 

<윤이상>에서 나는 그의 향학열에 감탄했다. 풍금을 접하고 바이올린을 접하고, 기타를 배우고 첼로를 배우고, 악보를 읽고 악보를 만들고. 서울로 일본으로, 마흔 나이에 유럽으로, 그의 음악 학문 의지는 끝이 없었다.

그의 사상 편력에도 감복했다. 집안을 일으키고 출세를 원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신의 진로를 세우는 데서부터, 그의 생애 초기 30년을 지배한 일제강점에 대한 항거, 그리고 중후반 50년을 따라다닌 분단조국 현실에 대한 극복의지까지 무한했다.

새미골 위 산복도로서 바라본 통영항

 

 

 

도천동 새미골 골목에 소년 윤이상이 살아있듯, 지금 통영에는 윤이상 이름 되찾기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이전 도천테마기념관이 지난 9월 시의회 조례개정을 통해 윤이상기념관으로 바뀐 게 첫 성과다. 다음 타겟은 도남동 통영국제음악당과 통영국제음악제다. 반론도 없지 않지만, 당초 건물 건립과 행사 취지에 맞게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새기자는 것이다.

 

2017년 10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