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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는 여행

10년전 그 골목 - 통영 동피랑 2006년

골목과 사람(35)통영 태평동 주전골

바다로 일나가던 남자들은 술담배로 일찍 저세상...할머니·꼬마들만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집 지켜

이일균 기자 iglee@idomin.com 2006년 11월 20일 월요일

 

 통영의 태평동 ‘동피랑’ 언덕에는 주민 이(여·69)씨의 인생유전이 있다. 헉헉거리며 고갯마루에 올라서야 그 사연을 만나게 된다. 그는 끝까지 이름을 밝히기도,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거부했다. 다만 멀리 세병관이 바라보이는 자신의 슬레이트집 빨랫줄 쪽으로 뒤돌아서서 괜히 널려진 옷을 만질 뿐이었다.

   
 
  ▲동피랑 꼭대기의 이씨 할매집. 한사코 빨랫줄에서 뒤돌아서지 않았다. 사진/이일균 기자  
 
길따라 펼쳐지는가파른 인생유전

“여기 집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한 집처럼 보이제. 사실은 세 채요. 다 주인이 안 다르나. 맨 안집이 내 집이고, 그 다음이 우리 친정 어무이 집, 또 그 옆이 우리 올케(72) 집이요. 하나같이 과부 할매들 아이가.”

그러고 보니 가운뎃집 방 안에 거의 몸을 움직이지 않는 노 할머니가 누워 있다. 지금 말하는 이씨 옆에는 또 병약해 보이는 올케가 왔다 갔다 했다. 어린 손자 빼 놓고는 남자구경 하기 힘든 집이다. 도대체 “일찌감치 세상 베맀다”는 이 집 남편들에게는 무슨 공통된 일이 있었을까.

 “사고는 아이요. 전부 다, 술 많이 묵고 안 죽었나. 하나같이 간이 안 좋았응께. 바닷일이나 막일이나 일은 힘들제, 술 담배는 많이 하제. 우리 아버지가 62에, 내 남편이 54에 세상 베맀지. 오빠는 49이었고. 마, 우리집만 그런 기 아이요. 주로 노인들만 사는 이 동네 집집마다 다 그렇지.”

 

옛시절 주민들, 주전골에 올라 억울한 사연 호소도

△주전골 정상에서 읍소하던 서민들

처음엔 주전골을 넘고, 다음엔 동피랑을 넘는 태평동 골목 여행은 세병관 쪽의 태평동 천주성당에서 시작한다.

세병관과 태평동 천주성당 자리에서 토성고갯길을 건너면 두 방향의 골목이 나 있다. 우선 아래쪽은 중앙시장 가는 골목이다.

100m 정도 이어질까. 난데없는 솟을대문에 안채마저 잘 보이지 않는 고가가 골목의 역사를 읽게 했다. 중앙시장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나중에 동피랑을 돌아 나올 때로 방문을 미뤘다.

주전골은 겹겹이 골목으로 계단이 만들어졌다. 시골 산골짝의 천수답 같다. 군데군데 돌담이 쌓인 골목은 시간대를 30년 이전으로 되돌렸다. 좁은 골목 사이로 멀리 동피랑 언덕이 보였다. 거기나 여기나 오래된 슬레이트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은 똑같다.

동피랑의 반대 방향에는 삼도수군통제사의 병영과 관아를 겸했던 세병관이 골목 위치에 따라 아주 가까이 보인다. 바로 아래가 태평성당이다.

   
 
  ▲ ▲강구안 쪽의 동피랑 골목에 선 사진작가 류태수씨.  
 
동행한 예총 통영시지부 류태수(55) 지부장은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세병관이 이렇게 가까우니, 옛날 억울한 처지의 주민들이 주전골에 올라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듯 사또에게 외쳤대요. 그리고는 잽싸게 도망 내려오고."

무슨 사연들을 그렇게 긴박하게 호소했을까. 소작값을 제대로 쳐 주지 않는 악랄한 지주의 행각? 고을 사또는 모르는 아전들의 전횡? 주전골이나 동피랑의 당산에서 세병관 쪽으로 읍소했다는 이 이야기는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도 나오니, 좀 더 진척된 추리도 가능하다.

태평동 골목여행은 이제 주전골을 넘어 동피랑으로 이어진다. 통영성 서문에 서피랑마을이 있듯이, 옛날 동문이 있었던 이곳에 동피랑이 자리 잡았다.

△동피랑에서 중앙시장으로

동피랑 언덕 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이씨 할매가 산다. 그러니 이 집에서는 앞쪽의 강구안 바다도, 뒤쪽의 세병관 쪽도 훤하게 뚫렸다. 좀처럼 빨랫줄 쪽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씨의 이야기가 계속 됐다.

"내 나이 열네살 때 이사와 벌써 50년이 안 넘었소. 그땐 전부다 초가집이었지. 태풍만 불먼 지붕의 짚단을 얽어매고 날아갈 물건들 묶고 난리였지. 그 때 사람들은 여 밑에 시장에서 장사하고, 노가다 나가고 그랬지. 지금도 비슷하고. 그때 잘 나가던 셋방이 오히려 지금 안 나가. 누가 이런데 올라와 살라카나!"

그러고 보니 대문 밖에 '셋방' 붙여놓은 집이 별로 없다. 옛날 초가 때만 해도 가족 열명이 방 두개만 있어도 하나는 세를 내줬다는데….

아빠는 바다로 일 나가고 엄마랑 오빠랑 얼마 전에 이사와 살고 있다는 은옥(10)이가 동피랑 꼭대기에서 물끄러미 기자를 쳐다봤다. 사람 사는 곳에 사연 없는 곳 있으랴. 그러니 가파른 달동네의 골목 속에는 그냥 듣고 넘기기 어려운 인생유전이 스며 있다.

동피랑 오르는 길은 네 방향에서 시작된다. 주전골과 중앙시장 방향, 통영항 쪽의 항복목과 동호동 쪽에서 가파른 골목이 기어오른다.

   
 
   
 
동행한 류태수 지부장은 한때 동피랑 등 통영의 1960년대 이전 사진을 모아 '통영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사진집을 냈다.

그 중에서 강구안에서 바라본 동피랑의 모습을 확인했다. 정말, 지금 슬레이트집보다 더 많은 초가가 언덕을 빽빽이 채웠다. 사진작가인 그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래서 24시간 변모하는 통영의 바다와 시내를 모조리 담았다. 그의 통영 사진에는 아쉽게도 사람이 많이 없다.

"자연을 찍는 것과 사람을 찍는 건 길이 완전히 다르지요. 사람은 정말 제약이 많죠. '잘 찍었다, 못 찍었다' '실어라, 말아라'. 저는 그래서 자연의 풍광쪽을 선택한 거죠."

강구안 쪽 항복목으로 내려와 오후 5시로 '성시'를 이룬 중앙시장 활어골목으로 들어섰다.

결국 서호시장으로 시작한 통영의 골목 취재가 이곳 중앙시장에서 끝이 나는 셈이다.

감성돔이 한 두 마리 끼어 모두 너댓마리가 넘는 활어 다라이 하나에 보통 3만원이었다. 혼자서 1만원짜리 광어 한 마리도 먹을 수 있다. 간이의자에 앉아 초장에 소주까지 시켜도 1만5000원. 경상도 말로 '푸지다.' 오후 6~7시 '떠리미' 시간에 중앙시장 활어골목을 찾으라. 너댓명이 오만원이면 회로 떡을 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