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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는 여행

10년전 그 골목에 갔다 - 마산 부림시장

42일 부림시장 골목

개나리 진달래 벚꽃

온갖 봄꽃 만발했던 오늘 마산 서원곡 산복도로에서 추산공원을 넘어 할머니가 입원해계신 오동동 요양병원까지 봄나들이를 하던 중.

옛날 강남공원 있던 자리를 지나다 문득 발견했다.

부림시장 닭전골목.

2 때였던 1982년 어느날 친구 누군가를 따라와 낮은 천정의 다락방에 웅크리고 앉아 닭곱창에 처음 쐬주를 마셨던 곳. 그날밤 가족들을 속이고 멀쩡하게 누워자다 끝내 모든 걸 올려버리면서 탄로나버렸던 기억 속의 장소.

그리고 몇 년 지나 마산 가포에서 방위 받을 때였던 1988년 방위 고참과 다시 찾았던 곳. 한 달에 한두 번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니 강좌철학 같은 책을 함께 읽으면서 스스로 빨간 물을 묻히기 시작했던 곳.

그렇게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던 닭전골목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그 골목에는 지금 닭곱창 집이 남아있지 않다. 서원식품이라고 투명색 테입의 가게 이름이 다 떨어진 채 녹슨 양철 외벽만 잔해로 남았다.

 

 

 

 

 

 

10년 전에도 이 골목을 찾았었지.

여기뿐만 아니라 염색집골목이니 포목점골목이니 부림시장 구석구석의 골목을 찾았다.

부림시장은 어시장과 함께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이다. 100년 전 일제 때 지금의 위치를 잡았던 점, 250년 전 마산포조창이 들어서기 전부터 5일장의 윤곽을 형성한 점이 마산어시장과 같다.

그러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역사보다 두세 차례 반복된 대형 화재와 재기, 번영과 쇠락을 거듭해온 굴곡과 음영이 마치 인생을 연상시키는 곳이다.

오늘 다시 찾은 염색집골목과 부림시장 지하의 먹자골목이 그런 시장 이미지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염색집으로 시작된 그 골목은 이제 더 이상 골목이 아니었다.

맞은편 식당들과 점포 건물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건물들이 모두 헐린 자리에는 부림문화공원 조성 공사가 시작됐다.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던 제열이가 이 광경을 본다면.

 

 

 

 

그리고 그 옆,

부림시장 지하의 먹자골목은 지금 청춘바보몰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을 했다. 10년 전의 비빔밥집 칼국수집은 사라졌다.

 

 

 

 

하지만 부림시장 안 포목점골목과 6·25떡복이 같은 떡복이집골목은 명이 길다. 떡볶이집마다 봄꽃 만발한 휴일 나들이객들로 여전히 북적거렸다.

사라진 곳, 사라지는 곳, 여전히 번성하는 곳, 새로 생긴 곳

태어났다 성장하고 쇠락하고 사라지고

부림시장 골목은 생긴 그대로의 인생이다.

이제 10년 전의 그 골목을 찾아가보자.

 

 

골목과 사람(7)마산 부림시장 염색골목

묵자 골목·포목 골목과 함께 시장 3대축을 이룬 ‘색깔 마법사 거리’

이일균 기자 iglee2@dominilbo.com 2006년 04월 22일 토요일

 

2평 남짓한 염색소 내부. 화로 위에서 펄펄 끓는 염료를 휘휘 젓고 있는 안경을 쓴 염색사는 마법사 같다. 때마다 색을 바꾸는 팔색조처럼 같은 화로 안에 부어지는 염료에 따라 처음 들어간 옷이 팔색의 둔갑을 한다. 문을 연지 50년을 넘긴 염색소가 부림시장 ‘묵자골목’ 끝나는 곳에 있다.

   
▲ 위에서 내려본 마산 부림시장 내 염색골목과 묵자골목 안 할매집 며느리 전외문씨.

2평 남짓한 염색소 내부. 화로 위에서 펄펄 끓는 염료를 휘휘 젖고 있는 안경을 쓴 염색사는 마법사 같다. 때마다 색을 바꾸는 팔색조처럼 같은 화로 안에 부어지는 염료에 따라 처음 들어간 옷이 팔색의 둔갑을 한다. 문을 연지 50년을 넘긴 염색소가 부림시장 ‘묵자골목’ 끝나는 곳에 있다.

“이름은 무슨 이름 예. 이래 오래 해묵은 것도 미안한데. 사진 예? 그냥 가이소 마.” 6·25 후에 이곳에 염색소를 차렸다는 그는 50년대 부림시장의 모습을 안다. “그때 시장에 미군 군복이 쏟아졌다 아임니꺼. 진해에서 넘어왔지예. 그걸 사람들이 이 골목 안에 너댓개 있던 염색소에서 색깔을 바꿔 갔지예. 그래서 염색골목이라 안캅니꺼.”

시장은 그때부터 포목 주단 한복에 양장까지 겸하는 의류 시장의 이름을 얻었다. “72세”라고 나이만 밝힌 염색사는 “어쩌다 보니 이 골목에 염색사로는 혼자만 남게 됐다”며 염료 속에서 옷을 걸고 있는 막대기를 휘휘 돌렸다. 몇백년 전 아무 것도 없는 들판에 포구가 들어서고 기관이 세워지면서, 하나 둘 골목이 생겨나듯 여러 갈래의 선이 생겼다.

지금은 반세기 역사 뒤로한 채 명맥만…

△골목에서 또 다른 골목으로

시장의 역사는 백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24년부터 ‘부림공설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최소한 80년을 넘는다. 시장번영회 진상태 회장은 여기에 ‘5일장’의 역사를 얹는다. “5일 10일 열렸던 마산장이 여 아임니꺼. 공설시장 되기 전부터지 예. 어시장이나 창동하고 바로 통했으니 여기만한 5일장 자리가 어디 있었겠습니꺼?” 진 회장은 70년 6월 당시 부림 상시장과 하시장을 가르던 철길 아래 굴다리에서 화장품 등의 잡화상으로 재래시장 인생을 시작했다.

마산시사 등의 기록을 살펴보자. ‘1924년 만들어진 도미마찌(富町) 공설시장이 지금의 부림시장 전신이다. 그때부터 5칸 내지 9칸으로 된 3동의 벽돌 건물과 여러 채의 함석지붕을 가진 건물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시장 주변에는 수많은 노점상인들이 어울렸다.

 

   
특히 음력 5일과 10일 열리는 정기 장날에는 인근 50리 안팎에서 모여드는 장꾼들과 손님들로 큰 성황을 이뤘다. 그 뒤 마산 부영 청과시장이 41년 5월 부정(부림동) 현 강남극장 앞에서 열렸다. 장차 부림 상시장이 된다. 해방 후 부림시장은 기존의 곡물상 청과물상 야채상 포목점 잡화점 식료품상과 귀환동포들이 차린 노점상들로 가득 메웠다.

 

진해 구 일본해군의 지하보급창고에서 군복 작업복 군화 기계부속 유류 등이 흘러나왔다. 오랜 전통을 지닌 마산의 5일장은 해방직후까지 구마산 부림시장 앞 도로변을 중심으로 길게 장이 섰다.’

6·25이후 쏟아지는 미군 군복을 다른 색깔로 바꿔가며

5일장을 겸했던 옛 시장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 세 곳의 오랜 골목이다. 염색골목과 묵자골목(떡골목), 포목골목 등. 그곳엔 노령의 염색사처럼 계속 일을 하고 있거나 최근 은퇴한 산 증인이 있다. 또 대물림된 점포가 연륜을 증명한다. 얼마 전 은퇴한 포목골목 내 백합주단(옛 동일상회)의 박경수(84) 할머니, 속 든든한 장터국수로 묵자골목의 기원이 된 ‘은방울식당’ 등이 시장의 생명력을 전한다.

△머리 아프요. 커피 한잔 먹고 그냥 가소!

때마침 40~50년전 시장 안에서 만나 함께 의지하고 있다는 70대 주단집 할머니 등 세 분을 만났다. 그런데 시장에서 보낸 세월에 대해 걸쭉한 입담을 기대했던 건 잘못이었다. “신문사는 뭐 하고 있소 도대체. 만날 백화점에 마트 이야기나 쓰고. 여 딸린 사람들이 얼만데.” 옛 이야기를 하기에는 버거운 현실 속에 있는 그들에게 한두 가지도 아닌 질문을 해대니 당연하기도 하다.

약간은 달아오른 머리로 그래도 할매들 옆에 앉아 간간이 연결되는 골목 생겼던 이야기, 염색집 국수집 같은 명물 이야기 등을 엮고 또 엮었다. 시간이 가도 말의 뽄새는 곱지 않았다. 급기야 “골 아픈 이야기로 힘 빼지 말고 그냥 가소. 커피 한잔 묵고.” 대충 수습하고 나오느라 욕 봤다.

염색골목의 추억어린 역사가 시작된 것이지요

50년 전 쯤에 염색골목과 그 옆 묵자골목, 또 그 옆 포목골목이 연결돼 있었다는 이야기가 성과였다.

다시 시사의 기록. ‘부림시장은 1962년 근대적 시장으로 개축됐다. 이후 70년 현재 시장 부지 3120평에 시설면적 2700평을 지닌 10동의 건물에 641개 점포가 입주했다. 그해 상공부의 허가를 받아 부림시장번영회를 만들고 시유재산인 시장 소유권을 상인 422명에게 모두 매각함으로써 완전히 민영시장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민영화된지 2년만인 1973년 화재로 600여 점포가 모두 불탄 후5억원이 넘는 재산피해를 보았다. 다음해 9월 대지 700평에 2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의 부림 웃시장을 완공했다. 75년 5월에야 현재 시장의 모습이 다시 갖추어졌다. 나머지 부분의 시장도 완전 준공됐다.’

시장은 그렇게 지금 모습을 갖췄다. 구석구석을 둘렀다. 게다가 100년 역사를 왔다갔다 했으니 출출하다. 30대 이하의 세대 같으면 이럴 때 중앙통로 입구 떡볶이 집을 찾기 십상이다. “아는 사람들은 여 안 옵니꺼!”

중앙통로 옆 묵자골목 안에서 30년 된 할매집의 며느리 전외문(52)씨가 금방 만 국수에 참깨를 뿌리며 말했다. “지금도 열 집이 여기서 식당을 합니더. 손님이 메뉴를 세 번 다시 시켜도 그대로 갖다 주는 데가 여 아임니꺼.”

 

 

 

골목과 사람(8)마산 부림시장 닭전골목

다락방 가득한 ‘첫 경험’ 의 추억

이일균 기자 iglee2@dominilbo.com 2006년 04월 29일 토요일
첫 경험. 가슴 두근거리게 했던 기억. 고교시절 어느 날, 이름 모를 친구에게 이끌려 세상 태어나 처음 술 한잔하러 나섰다. 좁은 술집엔 다락으로 통하는 경사 급한 계단이 있었고, 다락에선 허리까지 숙여 자리에 앉았다. 25% 알코올은 처음에는 몇 잔까지 마셔도 무감각했다. 얇게 썬 닭 내장에 당면이 수북한 닭곱창 국물을 먹고 나서야 혓바닥 감각이 돌아왔었다. 그때서야 앞에 놓인 상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지금 그 다락방엔 3~4년 전에야 손님을 받았을 법한 테이블에 소복한 먼지만 앉아 있다. 그리고 벽에 쓰인 글귀. “정숙아! 니는 내 끼다! - 00짱 기봉이”

   
▲ 손님 잃은 닭곱창집 다락방, 사연은 벽에 남았다.
마산시 부림동 중앙로 위쪽 옛 강남극장에서 연흥극장 일대에 이르는 닭전골목의 풍경이다. 부림 상시장의 상가와 상가를 연결하던 닭전 골목에는 80년대까지 스무집이 넘는 닭곱창 집이 독특한 구조의 다락방으로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의 답답한 가슴을 뚫어주었었다.

어디 그뿐인가. 수출자유지역이나 한일합섬 노동자들, 경남대학이나 창원대학(이전 마산대학) 학생들이 술잔을 곁들이며 의식화(?) 학습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지금 그 골목엔 셔터 내린 점포만 가득하다. 그리고 대여섯 집이 닭곱창 간판을 걸어놓은 채 자주 찾지 않는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고교시절 난생 처음 마신 술

△고등학생들 첫 술 먹던 골목

고등학생들의 잦은 골목 출입이 낭만적이기만 했을까. 닭전골목에서 닭곱창 집을 한 경력 41년의 오순개(79) 할머니와 아들 신종철(54) 씨는 때때로 이 때문에 갈등을 빚었다고 했다. 아들 신씨는 심지어 어머니를 고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제가 젊었을 때부터 술집에 학생들 받는 게 그렇게 싫대 예. 어느 집이든 다락을 만들어놓고 다 받았지마는. 한두번 먹는 아-들이야 추억이겠지만 이게 술이 취하면 온 동네가 개판이 됐거든 예. 마, 솔직히 제가 경찰에 우리 가게를 고발한 적도 있어 예. 그 때 돈으로 벌금이 50만원 가까이 나왔다 아입니꺼.”

2006년 4월 그 골목에는 곱창집 다락방으로 학생들을 몰래 들이던 첩보극도, 맛도 모르던 소주에 정신을 잃고 벌이던 한바탕 패싸움도 없다. 양쪽으로 문 닫은 강남극장과 연흥극장처럼 길쭉한 골목에 셔터 내린 점포 사이로 휑한 바람이 지나갈 뿐이다. 그러나 이 골목 일대에 대여섯 집의 닭곱창 집이 남아 아직 그 맛을 잊지 않은 중·장년들을 맞이하고 있다. 오히려 요즘 부림 상시장에 그나마 사람 찾는 곳은 닭전골목 앞 중앙로 변에 포진한 서너 개의 문구 도매상이리라 .

닭전골목이 지금의 상가 형태로 바뀐 것은 1973년 부림시장 1차 화재 뒤다. 그 전에는 하꼬방(판잣집) 식의 점포에 노점이 들어선 형태. 특히 지금의 중앙로는 마산~삼랑진 철도였고, 닭전골목 사이에 양철 지붕의 장터가 있었다고 오순개 할머니는 전한다.

한잔 털어넣으면 세상이 빙글빙글

이 일대에서 닭전골목과 역사를 함께 해온 곳이 연흥극장 뒤편 가구골목. 때로 목공골목으로 불리기도 했고, 70~80년대에는 도둑놈골목으로도 불렸다. 연흥극장 옆에서 시작해 서성동 3·15의거탑 위 도로로 통하는 골목에는 지금도 가구점 의자점 목공소로 채워져 있다.

‘도둑놈’이라는 이름은 한 때 많았던 ‘넝마주이’들이 시내에서 이 물건 저 물건 주워 와 골목 안 만물상이니 철물점에 수두룩하게 맡겼다 해서 붙었다고. 시계방이나 여러 만물상 같은 곳에서 중고품을 찾는 손님들에게 부르는 물건값이 지나치게 높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도 있었다.

   
▲ 손기복씨의 주름, 가구 골목의 주름.
△닭전 옆 도둑놈 골목의 기억

골목 끝 한 목공소에서 향긋한 나무냄새가 흘렀다. 방금 대패질을 한 듯 예쁘게 몸통에서 일어난 나뭇결이 살짝 풍긴 향기였다.

나뭇결의 연약하며 보드라운 피부를 만지고 있던 터에 “누굴 찾소?” 하는 말이 뒤통수를 때렸다. 3년 된 ‘데이스타’ 125cc 오토바이에 작은 수레를 매달고 서 있는 손기복(77·마산시 부림동) 할아버지다.

답답한 속 털어놓다 친구와 주먹다짐도

“주인 부르까?”라는 말에 황급히 할아버지에게 관심을 돌려 이것저것 여쭸다. “난 이 옆에 살지. 농이나 책상, 의자 이런 거 배달하면서. 와, 무슨 볼일인데?”

“벌이? 참 내. 주문 받으먼 하루 5000원, 못받고 종이 고물 이런 거 주우먼 하루 3000원 안 그런나. 시내 배달은 가까운데 5000원, 먼데 만원 아이가. 요새는 마흔도 안된 젊은 친구가 들어서 주문 받기가 쉽지 않다.” “아, 이 오토바이? 내 재산목록 2호 아이가. 1호는 집이냐꼬? 아이다. 우리 할맘이 1호 아이가.”

밀양에서 성장해 20대 중반에 이 골목에 들어와 철물점 일을 했다는 손기복 할아버지. 그의 기억에 50년 전 이곳은 몇몇 하꼬방이 늘어선 이름 없던 골목. 닭전은 그때부터 철길 변으로 줄지어 있었다고 기억했다.

장차 이 골목이 목공이나 가구골목이 된 데에는 처음 들어섰던 몇몇 하꼬방 본을 떠, 들어서는 가게들마다 판잣집을 짓는 일과 관련이 있었다고 했다. 목공소나 함석집, 철물점 고물상 같은 곳이 그랬다.

 

2017년 4월 2일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