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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는 여행

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 마산 창동

마산 창동골목 하면 사람들은 학문당 쪽 예술촌 골목을 연상한다.

하지만 10년 전 내가 찾았던 골목은 창동 차 없는 거리 맞은편 빵집 고려당과 금은방 황금당을 입구로 하는 옛 골목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1760년에 세워진 마산조창과 연결되던 골목이라 하여 백년골목으로 불린 창동 최고의 옛 골목이었다.

우선 10년 전 기록부터 보자.

 

 

골목과 사람(6)마산 동성동 불로식당-해거름 골목

지역예술가들이 ‘술시’ 에 찾던 선술집 추억 서린 골목

이일균 기자 iglee2@dominilbo.com 2006년 04월 15일 토요일

 

이 골목은 마산시 남성동 파출소 직전 대신증권 등의 금융가에서 창동 ‘차 없는 거리’로 연결되는 통로다. 대신증권 한국투자증권 대한투자증권 경남은행 제일은행 등 한때 마산 금융가의 중심이 한쪽 편에 있다. 반대쪽은 창동 중심가다.

“마산포-마산창-창동 연결하는 백년 젖줄”

골목이 시작되는 곳은 맨 아래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각각 순안병원과 한국투자증권 옆 불로식당, 대한투자증권과 옛 오행당약국 맞은편의 주점 ‘해거름’ 입구 등이다. 전체적으로 골목이 생긴 모양은 불종거리 쪽에 작은 꼬리가 달린 ‘사(士)’자 형이다. 1760년에 인근 제일은행 마산지점에 마산창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지형적으로 마산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골목 중의 하나다. 장차 창동을 만들고, 부림시장을 만든 것이다.

   
▲ 선술집 즐비했던 골목에는 이제 간판만 걸린 통술집이 남았다. 최기섭씨 설명.

△ 직업도 바뀌고 골목도 바뀌고

누군가 “40년 전 골목은 ‘공(工)’자 거꾸로 한 모양이었다”고 했다. 몇 차례 골목을 찾아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묻고 또 물은 끝에 만난 ‘40년 옥녀 피부관리’ 집의 최기섭(72)씨가 그랬다. “해거름 쪽 골목은 그 뒤에 생겼다”는 것이다. 뒤에 만난 해거름 정의교(66) 사장이 “장사 시작한지 28년 됐다”고 했으니 그 시간 차이는 크지 않아 보인다. 이 골목이 백년 이상 마산포와 마산창, 창동을 연결한 젖줄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진주가 고향이라는 최씨는 20대였던 1950년대 말에 현 순안병원 앞길에 있었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담배 장사’로 마산에 발을 들였다. “터미널이 그 다음에 서성동으로 갔고, 또 합성동으로 갔지 예. 그때 창동 큰길은 차가 두 대 정도 지나다닐 만한 너비에 왜정집(일본식) 2층짜리가 드문드문 했습니더.” 최씨는 그 다음 오동동 요정집으로 일터를 옮겼고, 그때부터 피부 마사지 일을 했던 부인과 결혼해 지금의 동성동 골목 안쪽에 신방을 차렸다.

“이선관 시인 부부가 운영했던 식당이 뒤에 예술의 산실 ‘고모령’ 이 됐죠”

“그때 오동동은 흥청흥청했고 동성동 골목 쪽은 조용했지 예. 할매가 하던 곰탕집이나 현대여관 같은 기 있었지만은. 그 뒤에 60년댄가 70년댄가 ‘망가집’이 생기고, 막걸리집 통술집이 줄을 이었지 예.”

그리고 20여년전 이 골목 가운데에 있는 지금의 피부관리실 3층 건물로 이사를 했다. “그때부터는 부산에서 무역선을 탔습니더. 요정도 예전같지 않았고, 안사람이 피부관리실 하면서 살림을 했지예. 그때까지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이 찾던 창동이 젊은 사람 위주로 바뀌고, 그때부터 이 골목이 죽었지예.”

세월 따라 변한 최씨의 직업처럼 골목의 성격이 바뀌었다. 대표적인 것이 선술집. 지금은 간판만 달린 ‘송학통술’ 아래쪽은 하나같이 통술집에다 막걸리집, 대폿집이었다고. 길 건너편 오동동 쪽이 요정골목 등 ‘삐까뻔쩍’했던 고급 술집이었다면 이쪽은 선술집 골목이었던 셈이다.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이 만만하게 찾을만한 밥집도 많았다. 할매가 오랫동안 했다던 곰탕집은 이름을 되살리기 어려웠다. 지금 남아있는 불로식당 창동식당 충무할매김밥 같은 곳도 30년을 넘지 않았지만 어제 오늘 생긴 집이 아니라 한다.

△ 고모령이 있던 골목

골목의 특징을 나타냈던 명물 중의 하나가 80년대 해거름 맞은편에 있었다는 ‘고모령’. 지역의 예술가들이 때가 되면 모여들었던 사랑방 같았던 ‘고모령’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해거름 정의교 사장의 기억에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우리가 80년부터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2년 뒤인가에 이선관 시인이 맞은편의 지금 의상실 자리에 식당을 시작했지요. 이선관 씨가 음식을 나르고, 그의 부인이 아이를 들쳐 업고 음식을 만들었던 ‘반 밥집에 술집’이었습니다. 몇 년간을 하다가 이 시인과 함께 일했던 사람이 부림시장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열었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당시 함께 일했다는 사람은 아마 문자은(66·마산시 산호동) 여사일 듯 하다.

   
고모령 ‘문여사’로 통했던 문씨는 앞서 들었던 이야기를 일부 정정했다. “함께 일은 하진 않았고 이 시인의 식당을 인수해 ‘고모령’을 개업했지요. 시인은 황금당 골목 쪽에서 ‘구월 찻집’을 새로 만들었고. 그때가 79년이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고모령은 지역 예술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84년 마산의 문인과 화가들이 글 그림을 그려 만든 엽서를 고모령 벽에 전시한 것이 지금도 매년 연초에 대우백화점에서 열리는 ‘대동제’의 발단이다. 88년에 부림시장 떡방앗간 옆의 고모령에서 정식 ‘대동제’ 행사가 시작됐다.

설 명절을 보낸 사나흘 후 예술인들이 고모령에 모여 서로 인사하고, 문학과 미술, 음악과 무용을 함께 나누었던 훈훈한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신청곡을 받는 주점 ‘해거름’의 정의교 사장이 궁금해 했던 것이 고모령의 자취. 고모령은 그 뒤 서성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98년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졌다.

 

 

언급된 것처럼 이 골목 입구는 5곳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이들 입구의 지형은 대폭 바뀌었다. 입구뿐만 아니라 사진 속 최기섭 씨가 안내했던 골목은 사라졌다.

20129월에 창동공영주차장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 지형을 완전히 바꿨다. 할매충무김밥에서 시작해 옥녀피부관리-송학통술-슈바빙으로 이어졌던 그 골목이 공영주차장 옆길로 확장됐다. 골목을 이었던 가게들도 모두 사라졌다.

 

 

10년 전 할매충무김밥-슈바빙으로 이어졌던 옛골목 자리에 창동공영주차장이 들어섰다.

 

 

 

이쪽 골목을 기웃거리다보면 희미한 옛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마산 예술영화관 리좀 옆으로 토담집이니 옛날집, 북경관 같은 작은 식당을 보듬고 있는 샛골목이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고 창동 옛 골목 형태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창동거리 쪽 고려당과 황금당에서 시작해 복희집으로 이어지는 골목은 지금도 예전 그대로다.

 

 

 

 

 

또 역사 속 마산조창 자리인 옛 제일은행 맞은편 오복보리밥집-해거름으로 연결되는 골목은 예전 그대로다. 가게들이 많이 바뀌었을 뿐.

 

 

 

 

 

 

이름을 언급한 가게들은 지금은 모두 마산 명물이 되어 골목의 정취를 담고 있다. 백년골목이란 별칭도 마산조창이 생겼던 때를 거슬러 올라가 ‘250년 길로 좀 더 정확해졌다.

 

 

 

 

 

 

2017319일 일요일 오후의 250년 길은 북적거릴 정도는 아니지만 생기를 잃지 않았다.

창동거리를 활보하던 이들이 오후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복희집 단팥죽을 찾고, 닭갈비집을 찾고, 돈가스집을 찾는다.

 

 

 

흘러가버린 10년을, 마산의 250년을 이 골목에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