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훌쩍 떠나는 여행

10년전 마산어시장 복국 장어골목

골목과 사람(1)마산 남성동 어판장 골목

물고기 생사가 갈리는 ‘천년의 포구’

이일균 기자 iglee2@dominilbo.com 2006년 03월 04일 토요일

 

왜 골목을 기록하는가? 답을 찾기 위해 골목에 대해 사람들에게 물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 ‘들어가면 못 나오는 곳’ ‘연인들이 몰래 뽀뽀하는 곳’. 이런 대답도 있었다.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이 나란히 가는 곳’, 응답의 공통점은 ‘사람의 소유’라는 것이었다. 바쁜 사람 한가한 사람, 기쁜 사람 슬픈 사람, 나이 어린 사람과 지긋한 사람이 함께 부대끼는 곳이 골목이다.

골목의 쇠락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새삼스럽다. 네모로 블록화 되는 상권과 주거권으로,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옛 골목이 거리로 구획돼 가는지 오래다. 주거공간의 변화는 의식과 문화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골목을 기록하는 일이 급해졌다. 역사가 없는 현재와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장차 없어질 골목의 모습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단편적이나마 남긴다. 마산을 그 처음에 두는 이유는 도시발전의 정점인 포구를 축으로 점점 더 폭넓게 형성된 마산의 골목이 그 형태를 유지하는 곳이 많아 상징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마산시사, 허정도 건축사의 ‘근대기 마산의 도시화과정 연구’ 논문 등이 참고 자료가 됐다.

   

 

△마산이 시작된 곳, 마산을 시작하는 곳

마산은 남성동 어판장 골목에서 시작된다. 새벽 6시, 이곳에서 선어(냉동어) 활어 공판이 시작되면 곧바로 뒤편 중매인 점포가 늘어진 골목에서 소매가 이어진다. 경운기의 발동처럼, 중장비의 모터처럼 이 골목은 도시를 가동시킨다. 더듬어보면 마산이라는 도시를 형성시킨 근원도 ‘마산포’라는 포구였다.

마산포의 기원을 가장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고려 성종 때인 900년대 석두창의 설캄라는 기록이다. 전국 12조창 중 하나로 세공미의 수송을 담당했고, 현 산호동과 남성동 일대의 포구에 있었다고 기록됐다. 그러나 포구의 형상을 들어 남성동 쪽 주장이 유력하다. 이는 조선 영조 때인 1760년 마산창의 설치로 연결된다. 석두창처럼 대동미의 수납과 운반을 맡았다.

이동수단은 당연히 배. 마산창의 위치가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이었다 하니 당시 포구의 위치를 그 앞쪽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마산창을 축으로 마산의 동성·중성·오산·서성·성호·성산 등 6개 이가 형성됐다. 또 포구 주변으로 오선선창·어선창·백일세선창·서성선창 등이 운영됐다. 그래서 이 일대를 ‘원마산’ ‘구마산’이라고 한다. 도시 형성의 거점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마산의 거리나 골목을 유심히 걸으면 포구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도시탄생의 구심제어판장 사람들 생명력도 ‘펄떡펄떡’

어시장 끝 어판장 골목은 길이가 채 1㎞가 되지 않지만 구역은 남성동 동성동 오동동에 걸쳐 있다. 짧은 거리에 법정 동명이 즐비하듯, 이곳을 생업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어판업무를 관리하는 수협 사람들과 그 아래 기선저인망조합이나 권현망조합 사람들, 경매사와 중매인·소매인, 생선을 배에서 끄집어내 경매 후 마지막 포장까지 전 과정을 맡는 항운노조 조합원들까지.

‘펄떡 펄떡’ 뛰는 생동감을 느끼고 싶다면 새벽 6시 어판장의 서쪽 활어경매장을, 경매의 규모가 가장 큰 선어 경매를 보고 싶다면 같은 시각 가운데 위치한 경매장을 찾으면 된다. 권현망조합이 관리하는 멸치 경매는 오전 10시에 시작된다.

1979년부터 이곳에서 일했다는 기선저인망조합 소속 최석준(54) 씨는 “지금은 선어판장만 하루에 5000~6000개(박스) 겨우 넘깁니더. (위판액이) 1억원 안팎밖에 안 됩니더. 80년대만 해도 두세배 넘었지예.” 어업자체의 위축으로, 근해어업에 대한 지나친 제약으로 오그라든 어판장의 오늘이 담겨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판장의 생명력이 그렇게 호락호락할까. 삼국시대 마산의 이름이 ‘골포’였듯이 마산의 포구기능은 1000년을 넘는다.

한순간의 위상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없는 어판장의 기능을 중매인 경력 50년의 현역 서양수(75) 중매인의 말에서 느낄 수 있다. “살다보면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소. 잘 하는 사람, 못 하는 사람 생길 수밖에 없지. 물론 70~80년대만큼 고기도 다양하지 않아. 부산처럼 물량이 다양해져야 되지. 중매인들도 손님을 유치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해야 하고….”

 

 

골목과 사람(2)마산 어시장 복국 골목

복작복작 세상사 끓어넘치던…40여년 불이 꺼지지 않는 골목

이일균 기자 iglee2@dominilbo.com 2006년 03월 11일 토요일

 

남성동 어판장은 마산이 시작된 곳, 마산을 시작하는 곳이다.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거슬러 ‘마산포’라는 이름으로 도시 형성의 근원지가 됐다. 지금도 새벽 6시면 수산물 경매로 도시의 하루를 열어제친다.
어판장 바로 옆에서 도시의 하루를 조용히, 때로는 흥청거리며 지켜보는 곳이 복국골목이다.

   
▲ 복국 골목과 함께 20년을 훌쩍 넘긴 세월, 하익자(64) 할매의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다.
경매를 마친 어판장 일꾼들에게는 이른 아침식사를, 아직도 하루를 끝내지 않은 주당들에게는 늦은 해장국을 제공하는 곳이다.

어시장 동쪽 입구 맞은편의 오동동 복국골목에는 서른 집이 넘는 복집이 서너 블록에 모여 있다.
규모나 역사나 전국 어느 곳과도 차별되는 이곳에는 그만큼의 ‘사람 사는 사연’이 배어있다.
처음 복집이 생기고 지금처럼 늘어난 과정, 복어 독에 중독돼 요리사가 먼저 죽은 사연, 새벽부터 그 다음날 새벽까지 거친 술손님들이 쏟아내는 만만찮은 세상사들이 주저리주저리 담겨있다.

   

△스물네시간 마산의 주당들이 쏟아내던 사연들

오동동과 동성동에 걸쳐 있는 복국골목은 일제 때에 뿌리가 만들어져 1950년대 이후 점차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일식인데다 마산 어시장이 참복 등 복어 집합장이 되면서 일제 이후 복어 요리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어시장과 오동동 일대에 집중됐던 마산의 주당들이 ‘속을 확 풀어주는 복국’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짐에 따라 복집이 하나 둘 늘었다.

복집이 늘어난 과정에 대해 가장 근접한 사연을 현 남성식당 업주 김승길(66)씨가 전했다. 어머니인 고 박복연씨가 40여년 전 지금의 ‘미진식당’ 자리에 복집을 열면서 골목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70년대까지 복요리를 하는 사람한테는 특수자격증을 도청에서 발급했어요. 마산에서는 어머니하고 신마산의 조일수씨 두 사람뿐이었지. 그런데 도가 귀찮으니까 이걸 시·군으로 넘겨 버린 거야. 그 뒤에는 별일이 다 생겼지. 우리 집에 종업원으로 일하러 들어왔다가 한두달 있다가 나가서 복집 차리고, 콩나물국밥이나 국수 같은 거 팔다가 복집 차리고, 별의 별 일이 다 생겼어.”

당연히 70~80년대 복어 중독 사고는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맛이 이상하다는 손님들 지적에 요리사가 한두 숟가락 맛을 봤다가, 오히려 요리사가 먼저 죽는 경우도 있었다. 복어 요릿집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40여년 불이 꺼지지 않는 골목

지금처럼 복집이 서른 집 가까이 집결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특수면허까지 행정기관에서 발급할 정도로 엄격했으니….

복어의 독성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많다. 양잿물로도 안 지워지는 술독의 얼레미나 요강의 오줌때도 복어 독으로 다 지웠다고 한다. 30㎝ 안팎의 ‘자지복’이 가진 독은 사람 33명, 쥐 330마리를 한번에 죽일 수 있다고도 한다. 특히 산란기인 5~7월에 가장 독하고,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복이 맛있다 하니 복어는 봄·겨울에 맞는 음식이다.

복집에서 주로 다루는 졸복과 까치복, 금복과 은복, 황복 등은 독성이 강독성보다 한 단계 낮다고 한다. 흔히 6000~7000원 주고 먹는 복국은 값이 싼 은복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복집 업주들은 그러나 2000년 이후 복어 중독사고가 현저하게 줄었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두 가지. 우선 독이 거의 없는 양식 복어가 많아졌고, 조리법 자체가 독을 제거하는데 철저해졌다. 간과 같은 내장에다 눈, 아가미까지 독이 들었을법한 부위는 죄다 씻어내고, 핏대를 없앤다는 이야기다.

복국골목을 찾는 손님은 식당이 문을 여는 시간만큼, 요리의 가격만큼 천차만별이다. 벌어지는 일도 다양하다. 이미 몇 차를 거쳐 거나해진 술기운에 이 사람 저 사람 발목까지 부대낄 만큼 식당 안이 좁으니 별의 별 일이 다 생긴다.

   
사람 사는 사연 고스란히 담아내던 곳

지금도 대부분의 복집은 하루 24시간 영업을 한다. 손님이 주로 찾는 점심·저녁 시간외에 2차·3차의 술자리 끝에 해장을 하려는 사람들이나 공판장 중·도매인처럼 이른 아침 식사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벽영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새벽영업 비중은 1997년 IMF외환위기를 전후로 정 반대가 됐다. 그 전에는 새벽영업 비중이 오히려 낮 장사보다 높았다.

덕성복집 업주 하익자(64) 할머니는 “어떨 때에는 중·도매인들이 돈 뭉치를 그냥 두고 가고 그랬어예. 나중에 찾으러 와서는 만원짜리 몇장 건네주기도 했제. 참 돈이 흘러 넘치던 시절이었지”라고 했다. 80년대 이전 어시장 사정이 좋았을 때였다. 당시 어판장 연 매출이 1000억원을 넘었다니 당시의 경제력을 그대로 전하는 말이다.

또 다른 업주는 “밤 12시부터 오동동에서, 어시장에서 새벽까지 손님이 안 끊기고 왔다 아입니꺼. 말도 마이소, 술 취한 사람들이 좁은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으이 싸움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주방입구에 그릇 담은 접시는 하루도 남아나는 날이 없었어예”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