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다 행복까지 바래?
‘행복’이란 말을 꺼내기가 미안한 세상이다.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직업을 가질 기회, 재난·사고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되
지 못하는 사회다.
그래서 행복을 말하면 마치 옆에서 눈치를 주는 것 같다.
“너는 거기다 행복까지 바래?”
마침 며칠 전 TV에 철학하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이 깜짝 출연해 행복을 말했다.
“한국에 여섯 번이나 왔다는데, 한국인들은 행복해 보이나?” “NO!”
그리고 그는 행복하기 힘든 한국인들의 평균적 여건, 살인적 경쟁체제 같은 걸 이유로 꼽았다. 하
지만 그 뒤 메시지는 희망적이다.
“(하지만)그게 문제라 생각 안 한다. 그렇게 행복한 사람은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나?” “한국인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걸 알면 행복해질 준비는 돼 있는
거다. 미국인들을 보라. 그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데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하하”
요즘 술 한 잔 되면 나는 득구에게 ‘행복’을 말한다. 득구가 고1이 되면서 맨 정신에 하는 대화가
점점 더 건조해지는 것도 이유다.
“… 쫌 해라” “…는 제발 하지 마라” 대충 이런 식이다.
이러는 게 싫어서 밤늦게 돌아오는 득구에게 “힘들제. 몸은 어떻노?” “뭐 불편한 건 없나?”라고
물으면 돌아오는 건 침묵이다. 기껏 해봐야 “몰라” “없어” 정도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주로 듣는 게 공부 이야기이다 보니 어쩔 수 없겠다 싶다. “학생부종합도 줄
이고, 수능도 절대로 바꾼다니까 남는 건 내신뿐이다. 정신 바짝 차리라!” “수학 포기하면 끝이다.
끝까지 놓지 마라” “목표가 있어야 된다. 그래야 자기주도학습이 된다!”
이러니 이제 고1 된지 석 달인데 득구는 벌써 고3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도 아들 얼굴이 좀 펴질 때가 있다.
특히 친구들 만나기 직전에는 설렘으로 가득하다. 친구들 만나고 온 뒤에도 그 에너지가 좀 간다.
그렇게 놀고 오면 가족들과 밥 먹을 때가 많은데, 그럴 땐 대화가 좀 된다.
밥 먹으면서 반주도 한 잔 곁들이며 나는 행복이란 말을 꺼낸다.
“그래, 니 행복한 얼굴이 참 좋다. 니가 언제 행복한지, 뭐할 때가 재미있는지 그걸 잘 알아라. 그
게 진짜 공부다. 지금 하는 공부도 다 그런 과정 아니겠나. 열심히 해라.”
결국 공부로 귀결시키는 내 논리가 가증스럽지만 어쩌겠나, 그게 내 수준인걸.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슬프면 슬픔 그 자체에 빠지는 한국인의 멜랑콜리가 행복으로 이
끌 수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도 세계적 작가 알랭 드 보통이….
내가 주절주절 행복을 말할 때 득구 표정이 이랬다.
“거기다 행복까지 바래?”
2017년 5월 17일